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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김아무개씨 집으로 또는 간판에 ‘고향’자를 내걸은 식당으로 가 밥상 위의 푸짐한 김치가 되었을 속이 꽉 찬 저 아까운 배추들이 신원리 밭을 떠나지 못하고 선채로 로타리 쇳날에 뭉개지고 있다.
 서울에 사는 김아무개씨 집으로 또는 간판에 ‘고향’자를 내걸은 식당으로 가 밥상 위의 푸짐한 김치가 되었을 속이 꽉 찬 저 아까운 배추들이 신원리 밭을 떠나지 못하고 선채로 로타리 쇳날에 뭉개지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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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충남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 개복숭아꽃이 만발한 농로를 따라 로터리를 매단 트랙터 한 대가 봄배추를 심은 비닐하우스로 진입한다. 긴장한 배추들이 진저리를 치더니 로터리 쇳날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비닐하우스 안은 지릿한 냄새로 가득찼고, 트랙터를 모는 농민의 얼굴엔 표정이 없다. 비닐하우스 옆엔 또 비닐하우스가 있다.

신원리, 창소리, 탄중리. 바다처럼 넓은 비닐하우스 촌 안에서는 지금 다 큰 봄배추들이 새파랗게 질려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잔인한 봄이다.

"그 놈의 물가안정 폭탄은 꼭 농민들한테만 떨어지네 그려."
"아, 대통령이 서민들 삼시 세 끼 싸게 맥일려고 그런대잖여. 그건 그렇고, 우리집 애들이 20~30만 원이나 하는 잠바를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사내야 한다는데 배춧값 내리듯 잠바값 좀 내려줬으면 좋겄네."

또 다른 비닐하우스 앞에도 농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실없는 얘기에 헛웃음을 터트린다.

봄배추 값이 대폭락했다. 농민들이 두 달 전만해도 금배추로 계약 재배했던 하우스 배추를 속속 갈아엎고 있다. 모두들 "이런 도박판이 없다"며 혀를 내두른다.

올해 2월 들어 예산군의 시설채소단지인 오가면 신원리와 신암면 탄중리, 신례원 일대엔 봄배추 모종 붐이 일었다. 2010년 이상기온으로 흉년이 들어 김장 배추 3통들이 한 망 가격이 최고 2만 원까지 크게 오르자 봄배추 특수를 예측한 산지유통인들이 계약재배로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봄배추를 심은 비닐하우스 1동에, 좋게는 300만 원 이상에 계약해 말 그대로 금배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봄배추 수확기인 4월로 접어들며 가격이 심상치 않더니 대폭락 사태가 일어났다. 4월 20일 가락동시장에서는 배추 1망(3포기) 가격이 2000원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4월 28일 예산농협직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배추 3포기가 든 한 망 가격이)1000원대까지 떨어져 아예 가격이 나오지 않으니 작업을 하지 말라는 연락을 시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전했다.

4월 23일 예산읍 창소리에서 만난 한 장사꾼(농민과 계약재배를 한 산지유통인)은 "(배추 가격 폭락 전) 비닐하우스 1동당 300만 원 대에 계약재배를 했으니 원물가격만 1망에 5000원대가 나온다"며 "작업비에 운송비, 마진까지 합치면 1만 원이라도 부족할 판인데…"라며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재배농민들은 "배춧값이 폭락하자 어떤 장사꾼은 잠적했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어떤 이는 가격 깎아 달라고 눈물로 통사정을 하고 있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산지유통인뿐만 아니라 계약재배한 배춧값 중도금을 넉넉히 받아놓은 농민들과 그렇지 못한 농민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더욱이 배춧값 폭락으로 장사꾼들이 배추를 뽑아가지 않는 바람에 후작을 하지 못하는 농민들이 애를 태우고 있어 2차 피해도 예상된다. 어떤 농민은 수박을 심는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약금 일부를 포기하고 배추를 갈아 엎고 있는 실정이다.

폭락한 배춧값, 3포기에 1000원 대... 후작시기 맞추려 갈아엎기도

배추밭을 갈아엎는 장면
 배추밭을 갈아엎는 장면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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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은 전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시설채소단지다. 특히 봄배추 생산점유율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이번 배추파동은 지역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농민들은 봄배춧값이 폭락한 원인을 정부로 돌린다. 정부가 물가안정을 이유로 겨울 배추 비축물량을 가락시장 등에 대거 풀었기 때문이다. 또 정부 비축물량이 남아 있는데도 중국산 생배추와 김치수입은 계속되고 있다.

생배추 수입 현황을 보면 올해 1월부터 4월 15일까지 4194톤을 수입했다. 작년 같은 기간(200여㎏)에 비해 크게 늘어난 수치다. 김치수입 현황을 보면 1월부터 4월 15일까지 7만3483톤을 수입해 작년 동기 5만여 톤에 비해 2만여 톤이 늘었다(출처 : 전국농산물산지유통인 중앙연합, 배추·김치 수입현황).

더구나 정부가 전국적으로 농협을 통해 계약재배까지 독려해 하우스 재배 면적이 대폭 늘어났다. 예산농협도 2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비닐하우스 봄배추 100여 동을 계약재배했다. 정부 주도로 막차를 탄 것이다.

예산농협 관계자는 4월 28일 전화통화에서 "한 망(3통)에 1000원도 안 나온다니 작업비도 못 건진다, 농민들에게 하우스는 비워줘야 하는데 위(농협중앙회)에선 아무 지침이 없다"고 답답해 했다.

농협은 농민들과 봄배추 비닐하우스 1동에 270만 원씩 계약재배를 했다. 하우스 1동에 평균적으로 배추 2000포기를 수확하면 1포기당 원가만 1590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지금 시세처럼 3포기 한망이 1000원도 안 된다면 수확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윤동권 예산군농업인단체협의회 의장은 4월 28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배춧값 폭락은 이미 예고돼 있던 일이다, 너무 많이 심었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농민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시장원리에 맡겼으면 차라리 괜찮았을 텐데 정부가 물가를 잡겠다고 개입했고, 그것도 부족해 농협을 앞세워 대량재배를 부추겼다, 그리고는 이제와서 시침을 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예산군이 대단위 시설채소재배단지인데 원예농민이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정부와 농협에 항의하는 등 공동대처하지 못한다"고 속상해 했다.

윤 의장은 또 "포전상인(산지유통인)과 농민 간의 계약관계도 문제가 많다"며 "정상적 계약을 맺고 표준계약서를 작성해도 (생물인 농산물의 특성상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계약조건을 이행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얼굴(신용)로 거래하고 만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고 나서 작물값이 떨어지면 가격을 빼주는 등 농민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데, 가격이 오르면 농민이 더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며 "이젠 군(행정)에서도 관심을 갖고 시설채소재배단지에 대해 체계적인 지도관리와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배추 로터리, #배춧값 대폭락, #배추파동, #계약재배, #물가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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