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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내려갔을 때, 삼촌은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도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했다. 몇 번이나 전화하려고 했었다며, 수줍게 웃는 삼촌의 눈을 도저히 마주볼 수 없었다.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 결혼 안 할 거야?

삼촌은 몇 번이나 취직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직장을 구해 안정되면 곧바로 장가를 보내려고 할머니는 노심초사했지만 허사였다. 삼촌은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처음에는 광주사태 관련자라며, 담당형사가 동태파악을 구실로 회사를 찾아가 사표를 내게 했다. 아버지가 고등학교 동창에게 어렵사리 부탁해 구해준 직장이었다.

그 후 다른 회사에 취직했지만 얼마 못가 그만두었다. 이번에는 사람들과 불화했다. 조그만 스트레스에도 견디지 못했고,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져서 일을 할 수 없었다. 5월의 후유증이었음에도, 삼촌이 너무 과보호되었던 탓으로 치부되었다. 또 다시 나약한 인간의 의지 문제였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구가 된 느낌이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믹서에서 껍질만 반쯤 까진 채 튕겨진 콩이 된 것 같았다. 다시 믹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새로운 떡잎을 틔울 수도 없이 내던져졌다는 외로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서글픈 막막함. 이제부터 그렇고 그런 인생을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열패감.

삼촌은 자꾸 내게 파고들었다. 그 또한 사람 체취에 저도 모르게 이끌리는 듯했다.

책상 위의 시계 초침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시계소리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원의 아래쪽을 내려갈 때는 뚜벅뚜벅 걷지만, 반원을 그린 후부터는 자신의 무게조차 지탱하기 힘든 듯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정상을 오를 때의 힘겨운 초침소리를 수십 번이나 반복적으로 들은 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오른손을 꼭 잡은 삼촌의 양손을 모아준 후 방을 나왔을 때, 안방에서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마루 위 판자들을 타고 넘어왔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내려다본 마당은 눈 내린 겨울밤처럼 밝은 은색이었다. 지붕 끝에 연이어 붙여놓은 반투명 슬레이트 위로 5촉 전구 같은 둥근 달이 달려있었다.

이제부터는 먼 길을 혼자 가야 했다. '함께 모여 우리 하나'가 되었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그들의 길을 함께 계속 갈 것이다.

외로움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몸이 오싹해졌다. 나 또한 바람에 실려 가다 어딘가에 떨어져 싹을 틔울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가 어느 곳일지 알 수 없었다. 

그해 여름 내내 광주에서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으나, 삼촌과 둘이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항상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 같았다. 세상에 무심하기로 작정하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짊어져야 할 시대적 의무도 내려놓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할 경제적 부담도 없었다.

가슴 한편은 늘 허전했다. 신문 한 귀퉁이에 단신으로 나오는 시위기사와 구속학생 명단에 혹시라도 아는 이름이 튀어나올까 싶어 사회면은 늘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그렇지만 방학으로 접어든 대학가는 조용했고, 안도감에 다른 면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만약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면 죄책감에 오랫동안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여름이 끝날 때쯤 우리는 형제가 된 느낌이었다. 호칭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우리를 약간 나이 차이가 난 형제인 줄 착각했다. 삼촌은 그걸 참으로 좋아했다.

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 빈소에서 서글프게 울던 중년여자에 대한 오래된 의문이 해소되었던 것이다.

광주에 내려온 다음날이었다. 누군가가 제 집을 들어오듯 쑥 대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마루에 스테인리스 통을 놓고 걸터앉았다. 그 때 삼촌 방에서 나오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이 집 거시기네. 엄니, 나 간당께!

내가 고개를 까닥하는 것을 보는 듯 마는 듯 아주머니는 가버렸다.

김치. 내 어머니가 평생 흉내내려했지만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던 전라도김치. 통 안에는 멸치젓과 어우러진 빨간 고춧가루 물이 탁하게 밴 김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주머니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초등학교 제자였다. 그리고 80년 5월 21일 금남로에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아들을 잃었다. 학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나갔던 장남이 쿠데타군의 총에 피살되었던 것이다.

그 일로 남편마저 충격과 상실감으로 주저앉았고,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처음에는 시체조차 찾지 못해 병원 영안실들을 헤매 다녀야 했다. 간신히 상무관에서 임시로 안치된 아들의 시신을 찾았을 때, 부부는 반쯤 실성한 상태였다. 뼈에 사무친 고통과 원한으로, 그들은 우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목숨 같은 자식을 청소차에 실고 가 매장한 후 아저씨는 술로 날을 새우고 밤을 죽였다.

정말 못 볼 것을 보았다고 했다. 스무 해 가까이 애면글면 키운 아들이 복부에 구멍이 뚫려 뒹군 몸뚱이로 남겨졌을 때, 판검사는 안 되어도 살아있기만 했으면,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어도 살아만 주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남편은 밤마다 수십 구의 시체들이 일어서서 살려달라고 달려들거나, 아들에게 총질한 그 자를 눈앞에 보고도 잡지 못해 발광하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면 억울함과 두려움에 술부터 찾았다.

실성하여 옷을 찢거나 벽에 똥을 칠하지 않았고, 네놈도 한통속이라며 세간 유리에 비친 자기 모습에 달려들거나 식구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천만 다행이었다.

원한과 분노, 상실감과 독한 회의를 이길 수 없으면 집을 뛰쳐나갔다. 그러면 다음날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거나, 보름이나 한 달 후 경찰서 유치장에서 데려와야 했다.

가장이 무너진 집안은 하루가 다르게 비참해졌다.

무능력자로 변한 아저씨를 대신해 아줌마가 식당주방 일부터 청소잡역, 술집주방 일까지 닥치는 대로 노동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두 딸들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 딸은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다음 해 여상을 진학하는 것으로 인생의 큰 방향을 틀어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막내딸은 너무 어려, 붕괴의 폭발적 충격으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었다. 그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음 해 아저씨는 몹시 추운 초겨울 날 새벽 골목에서 동사한 채 청소부에 발견되는 것으로, 한 많은 삶을 마무리했다.

아줌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네 집 근처로 이사 왔다. 고모를 대신해 딸 노릇을 시작했고, 후일 내게 장모라 불리며 철마다 김치와 젓갈을 올려 보내고 있다.

삼촌은 내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우렁이를 각시삼은 총각의 심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묻지 않아도 알아 볼 정도로, 당시 내 의식에 난 상처가 선명했거나 말이다.  

몇 달 만에 올라온 서울은 낯설기까지 했다. 한동안 거리의 방향과 공간 감각이 흔들렸다. 늘 술에 취한 것 같았다.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지 않아 서클 동기들에게 연락했다. 그들은 조촐한 환송회를 여는 것으로, 우리가 같은 콩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회상했다.

앞날을 함께 고민하기에는 지난 몇 달간 걸었던 길의 방향이 많이 달랐다.

- 처음에는 등하가 광주 출신인 줄 알았어. 뒤풀이만 가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느냐고 물었잖아. 

그랬던가? 나도 잘 모르는 걸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척했다고? 확실히 주제넘었구나 싶었다. 나를 배려하여 운동권가요를 부르지 않았고, 정세분석을 발제해온 친구도 없었다. 나 역시 주제넘다 싶어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청춘의 한 장이 막을 내렸다. 


태그:#광주항쟁, #상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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