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산교도소 두 번, 서울구치소 두 번에다 48시간 경찰서 유치장 구금까지 포함해 모두 다섯 차례 갇혀 있었던 공무원이 있었다. 경남도청 세무직 공무원으로 있다가 해직된 김영길(53)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이다. 공무원노조 활동으로 모두 '처벌'을 받았던 것이다.

공무원노조가 만들어지기 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전공련)'이 2001년 3월에 만들어졌고, 그 해 6월 9일 창원 용지공원에서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공무원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른바 '6․9창원대회'다. 이날 집회로 지도부가 징계에다 체포영장까지 발부됐다. 그 속에 김영길 전 위원장도 포함돼 있었는데, 꼭 10년 전의 일이다.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김영길 전 위원장은 경남도청 공무원직장협의회장을 지낸 뒤 전국공무원노조 경남본부장에 이어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그는 공무원노조 활동으로 체포영장, 강제연행에 이어 구속되기를 거듭했다. 그가 구속됐던 기간은 전체 7개월 정도다.

형사 처벌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무슨 흉악범인지 보호관찰까지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호관찰 판결문을 보니 범죄 재범 우려가 있다면서 유흥주점 등 출입금지와 술은 1주에 소주 1병 이상 마시지 말라고 해놓았더라"면서 "그 뒤에 술을 마시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놀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전공련은 '6․9창원대회'를 통해 공무원노조를 출범시킬 것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전공련은 정부 탄압에 항거하며 명동성당 등 전국 4곳에서 농성투쟁을 벌였고, 집단연가투쟁에서 1인시위도 벌였다.

공무원노조는 2002년 3월 23일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고려대에서 역사적인 출범식을 가졌다. "공무원도 노동자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출범한 공무원노조는 '상명하복 50년 굴종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비로소 불합리한 명령과 조직에 대한 조직적 저항권을 가졌다.

<오마이뉴스>는 '6․9창원대회' 10년을 맞아 그 대회를 기획, 주도했던 김영길 전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김영길 전 위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엎드려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개인적 사정으로 일상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에서 생계 지원금이 나와 생활하고 있는데, 제가 복무상태가 좋지 않다고 생계 지원금을 깎는다는 소리가 들려 씁쓸한 기분이다."

- 공무원노조 활동으로 공직사회에서 배제되었는데 후회하지 않는지?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 계속 있었더라면 지금 쯤 4급은 달았을 것이다. 대개 공직사회에서 어느 정도 직급이 올라가면 그렇듯이, '조중동' 신문이나 거기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책상에 두고 읽으면서 정상적인 교양인인양 생각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무원은 직업이 공무원밖에 없는 줄 안다. 넓게 보지 못한다. 한쪽 방향으로 경직된 사고를 하다가 끝날 수 있었을 것인데, 진보에 눈을 뜨고 함께 한 게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 하지만 가족들은 힘들 것 같은데?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냐. 자식이 고을 면장이라도 했으면 하는 게 부모의 바람이고, 친인척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들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을 몰랐다. 선거 때만 되면 한나라당 내지 여당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보면 안타깝겠지만, 할 수 없다. 조금씩 바뀌고 있다."

- 처음 생각했던 공무원노조와 지금 활동에 대해 비교해 보면?
"정권 차원에서, 소위 말하는 탄압이 심하다. 상식을 벗어난 탄압들이 자행되고 있는데, 세계적으로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 속에서도 공무원노조 활동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다. 공무원노조 1기는 집을 짓기 위한 준비 작업, 터 파기였다. 원래 터파기는 울퉁불퉁할 수 있다. 제가 맡았던 2기는 터파기를 한 곳에 주춧돌을 놓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주춧돌 위에 오두막집을 짓든 10층 빌딩을 짓든 다음 단계에서 할 일이었다. 공무원노조가 한때 쪼개져 조직을 생각하는 많은 동지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성장통이었던 같다.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하나 된 지금은 좋은 모습으로 잘 가고 있는 것 같다."

- 공무원노조 활동하다 해직된 공무원들이 복직해야 하는데?
"복직은 당연하다. 공무원노조 활동으로 공직에서 배제된 사람이 140명이 넘는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나 권력 차원에서는 공무원이 노조를 만드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공직사회에 노조가 존재함으로 인해,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이익으로 돌아간다.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는 것이다. 공무원노조가 우리 사회에서는 순기능을 엄청나게 하는데, 그 시절 권력에서 볼 때는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부당해고다. 지금 와서 원직 복직된다 한들 10년 세월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해직자들의 원직복직은 이루어져야 한다."

- 다른 해고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의 시민단체에서 일하기도 한다. 노조 안에 '해직자복직투쟁위원회'를 두어 활동하고 있다. 공무원노조 중앙이나 본부, 지부 등지에서 상근 활동가 역할도 맡고 있다. 각종 사안들이 발생할 때마다 동지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공무원들의 첫 대규모 결집 행사였던 '6.9 창원대회'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사진은 2001년 6월 9일 창원서 열린 '전국공무원 결의대회' 모습.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공무원들의 첫 대규모 결집 행사였던 '6.9 창원대회' 1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 사진은 2001년 6월 9일 창원서 열린 '전국공무원 결의대회' 모습.
ⓒ 이수영

관련사진보기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경남도청에서 직장협의회를 결성하고 경공련 회장과 공무원노조 경남본부장을 거쳐 2기 위원장을 하는 동안 굵직한 일들이 너무 많아 모두가 기억에 남아 있지만 꼭 10년 전인 2001년 6월 9일 창원 용지공원에서 7000여 명의 현직 공무원들이 처음으로 전국 규모의 장외집회를 했던 전국공무원대회, 일명 6․9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다. 처음으로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다 보니, 행사 마지막까지 반신반의 하면서 우려했다. 조직 안에서도 실제 가능하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것이 공무원노조의 시발점이었다. 경남의 공무원들이 그 행사를 만들어 낸 게 상당히 뿌듯하다."

- 현재 이명박 정부에서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이 심하다고 하는데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비교한다면? 실제 공무원노조는 노무현 정부에서 많은 해직자가 발생하지 않았나?
"활동을 주요하게 한 시기가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공무원 노조의 입장에서는 그때 많은 피해를 봤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악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민주 정부 10년 동안 공무원노조 입장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본다. 훨씬 더 진보적 성향의 세력이 집권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공무원들이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려고 하면 거의 비슷한 수준의 탄압이 있었을 것이다.

노조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비교하는 게 맞지 않는 것 같다. 참여정부 때는 노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많이 싸웠다. 2004년 4․15총선 때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에다 무기한 총파업 등 사건들이 많았다. 그런 여러 투쟁을 하면서 공무원노조를 사회에서 이슈로 만들었다. 당시 정권차원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노동조합법'이라 이야기하는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등에 관한 법률'에서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이라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정부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민의 정부 말기쯤에 정부안으로 나왔던 게 약칭으로 '공무원조합법'이었다. 정부 관료집단에서는 공무원들에게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다. 그래서 무슨 주택조합 하라는 말이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는데 최종 결정단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판단했던 것으로 안다."

- 공무원노조 활동과 관련해 진보․개혁적인 주장을 서서히 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지?
"온건파로 분류되는 조직들이 비판할 때 그런 주장을 했다. 공무원노조 존재를 알려내고,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과격하다는 표현을 하나 그 시절에 그런 투쟁이 없었다면 공무원노조가 대한민국 땅에서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무원이 무슨 노동조합이냐고 발광을 하던  '조중동'조차 지금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시시때때로 공무원노조에 태클을 걸지만 존재 자체에 대하여는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는다. 진보정당 지지 선언만 해도 그렇다. 공무원 처음 시작하여 구청에 근무할 때 보니, 공무원은 여당 선거운동에 동원되었고, 여당만 찍어야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노조가 전체 민중을 위한 정당에 지지하자는 주장을 했다. 권력 차원에서 굉장한 괘씸죄가 됐던 것이다."

- 공무원노조 조직이 아직 다 통합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 중 첫번째가 조합원의 권익 향상이다. 공무원의 권익에 관련된 사안은 중앙정부에서 관장하는 법령과 예산에 묶여있다. 지자체 장이 공무원의 권익 향상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이것이 공무원노조가 전국 단일 노조로 가야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산별 노조로 가야 한다. 원칙적으로 한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은 단일노조로 가야 한다. 지금은 국제적으로도 다국적 단일노조를 하고 있다. 뭉치면 힘이 강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눈 앞에 보이는 미세한 이익만 갖고자 한다면 결국 누가 좋아지겠나. 중앙정권이든, 도지사든, 시장․군수든 그네들의 입맛에 맞고 그네들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노동조합이 아니다. 권력은 노동자들이 뭉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무원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할 때도 얼마나 방해가 심했나. 결국에는 노동자 전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가는 게 권력은 두려웠던 것이다."

- 공직사회 개혁은?
"현직에서 떠난 지 10년 정도다. 현실감이 많이 없을 수 있다. 공무원들이 잘못하는 일들이 여전히 언론에 나오고 있다. 공조직이든 사조직이든 관료화 되면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난다. 공직사회 개혁과 내부 감시는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할 일이다."

- 공무원노조가 한때 명절 떡값 감시 활동도 벌였는데?
"큰 틀에서 깨끗한 공직사회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차원에서 지혜를 모았던 것이다. 공무원직장협의회가 1999~2001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부서 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부서에 보면 서무 역할을 하는 공무원은 명절 때마다 상급자 선물 챙기기가 급급했다. 민원인에게 손을 벌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했던 것이다. 공무원직장협의회가 만들어지고, 명절 때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에다 떡값 감시 활동을 벌였더니 당장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업인들로부터 감사 전화도 많이 받았다. '명절때마다 울며겨자먹기로 선물을 해야 했었는데 직협에서 명절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하니 그 핑계로 명절선물 하지 않을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다. 도시군청마다 매점이 있는데, 명절 때마다 선물을 많이 쌓아 놓았다. 그런 운동을 벌인 뒤에 매점 주인들이 '원망스럽다'는 소리를 농담으로 했다.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하니까 매출이 급감했다고 한다."

- 공무원노조가 만들어지고 나서 공직 사회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많다. 대표적으로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경남본부장 시절에 어느 시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이전에는 시장, 군수들이 마음대로 했는데 요즘은 공무원노조 때문에  시장, 군수들이 마음대로 못한다'고 했다. 공직사회 내부는 수직문화다. 국장이나 젊은 간부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다 보니 나이가 많더라도 9급부터 진급해온 공무원한테 반말하거나 상소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무원직장협의회가 생기고 난 뒤부터 확연하게 달라졌다. 간부들도 6급 이하 공무원들에게 경어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는 젊은 간부들이 머리카락이 하얀 직원한테 하대하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새로 임용된 젊은 공무원들은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김영길 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 기자실이며 연감 강매 문제 등도 바뀌었는데?
"공무원직장협의회나 공무원노조가 생긴 뒤 달라진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부서 서무 담당자는 경찰이나 언론사 기자들에게 인사치례 하는 게 주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서무는 어떻게 하든 선물이며 돈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경남도청에 중앙지와 지방지 기자실이 따로 있었다. 공무원노조가 나서서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했다. 당시 한 중앙지 기자는 '전두환 시절 언론통폐합보다 더한 치욕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기자실을 따로 둘 필요가 없어 하나로 묶었는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기자실 관련 일을 추진할 때 당초 의도했던 것보다 과도하게 나간 부분이 있었는데, 기자실 개방으로 시작했던 게 시,군 단위에서는 기자실 폐쇄로 진행되었다. 그 이전에 관공서 기자실의 폐쇄성은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이다. 또한 언론사들은 <연감>을 강매하다시피 했다. 내용도 거의 같은데 언론사마다 펴냈다. 공무원직장협의회와 노조가 나서서 강매를 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지금 일부 조합원들은 공무원노조가 해준 게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일반 기업체 노조도 마찬가지다.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성과물의 효과는 6개월 밖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공무원노조가 공직사회 분위기를 얼마나 바꾸었는지 모르고 내손에 직접 잡히는 게 없으니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무원노조가 조직내부의 수직적 문화를 수평적 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공무원노조가 만들어진 이후에 들어온 공무원들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사에 있어서 인사권자의 전횡도 많이 줄어들었다.

근무 형태도 바꾸었다. 가령 매년 겨울이면 산불비상근무 때문에 시군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주말에도 쉬지를 못하고, 겨울에 자주 있는 친인척 결혼식에도 못갈 정도였다. 토, 일요일에도 비상근무를 했기 때문이다. 노조에서 굳이 모든 부서 직원들이 다 비상근무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제기를 했다. 당직제도가 바뀌었고, 재택근무 할 수도 있도록 했다.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근무 환경이 매우 개선되었는데,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행정환경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밖에 없었다고 강변할 지 모르지만, 그러한 변화과정에서 공무원노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잡다한 일들이 많았다. 아주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이전에 동사무소에서 근무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지역에서 유지입네 하는 사람들은 등초본 떼러 오면, 창구 앞으로 오지도 않고 바로 '동장 계시나' 하면서 동장부터 찾는다. 차 한 잔 하면서 무슨 서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동장이 담당자를 불러서 간단히 인사를 시키면 민원서류 발급비용으로 만원짜리 한 장 꺼내 주면서 남는 돈은 커피 한잔 하라고 한다. 그런데 공무원직장협의회가 생기고 난 뒤부터 그런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한 마디로 편법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절차적인 편법은 줄어든 것이다. 공무원노조가 자기 역할을 온전하게 다하면 다수의 국민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행정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태그:#전국공무원노동조합, #김영길 전 위원장, #공직사회 개혁, #공무원직장협의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