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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실버천사 김성공 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습니다(사진은 폐지를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지난해 6월 실버천사 김성공 할아버지를 처음 뵈었습니다(사진은 폐지를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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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1년 중 명절에나 찾아뵙던 김성공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지난 6월 9일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갈 때마다 쌀이나 라면 박스를 가지고 찾아 뵈었는데 이번엔 빈손으로 찾아뵙는다는 게 못내 죄송했지만,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성공 할아버지와의 인연은 201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생활보호대상자이면서 폐지를 주워 판매해온 어느 산골노인이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사무소를 방문해 허름한 자루에서 200만 원을 꺼내 놓으며, "이 돈을 나보다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데 쓰게 해달라"며 기부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김 할아버지는 1954년 상서면 다목리에서 군생활을 한 인연으로 전역 후 1964년부터 막노동을 하며 이곳 다목리 마을에서 지금까지 살아오셨습니다. 가난 때문에 할머니는 약 한 첩 써보시지도 못하고 32세의 나이에 지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시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에 따라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리 절단 대신 약으로 치료하기로 하고 한쪽 다리를 끌며 휴지도 줍고 고철 등을 모아 생활을 해오셨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된 김 할아버지는 화천군으로부터 콘테이너박스 주거시설과 월 39만 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아왔습니다. 또 일주일에 다섯 번 지원되는 반찬은 김 할아버지가 인근 아파트 및 주택단지를 돌며 폐지 등을 줍는 여건을 충족하게 했습니다.

당뇨병을 방치해 합병증을 얻으신 김 할아버지께서 기자의 집요한 요구에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당뇨병을 방치해 합병증을 얻으신 김 할아버지께서 기자의 집요한 요구에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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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벌이래야 고작 4천 원 정도. 운이 좋아 버려진 냄비 등의 양은이나 고철을 주우신 날은 1만 원을 벌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2년 간 꾸준히 모은 돈 전액인 200만 원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써달라며 장학금으로 기탁하신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서면사무소 복지담당이 "할아버지! 이 돈은 받은 것으로 할 테니까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 생활하시는 데 쓰세요"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내 통장에는 아직 130만 원이나 있네. 그러니 부디 이 돈을 받아주게나" 하시면서 많은 돈을 기탁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듯 면사무소를 나가셨답니다.

당시 화천군청 홍보담당으로 있던 나는 이 내용을 보도자료 형식으로 언론사에 보냈더니 김 할아버지에게 '실버천사'라는 닉네임이 붙여졌습니다.

"폐지를 줍는 건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함이지"

그때 할아버지에게, 독지가들의 도움의 손길이 없었는지를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갑철이하고 39연대장에게 고맙지."

갑철이는 정갑철 화천군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정 군수가 콘테이너박스를 지원하고 매주 반찬을 비롯해 명절이면 쌀을 보내줬고, 39연대장은 명절 때마다 현금으로 10만 원씩 주며 용기를 심어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진건 없지만 나보다 못한 이웃을 돕는 것이 행복 아니냐고 말씀 하시던 김성공 할아버지(2010년6월 촬영)
 내가 가진건 없지만 나보다 못한 이웃을 돕는 것이 행복 아니냐고 말씀 하시던 김성공 할아버지(2010년6월 촬영)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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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시다가 당신은 한쪽 다리를 절며 움직이기라도 하지만, 지역 내에 자신보다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위해 장학금을 내시기로 결심을 하신 겁니다.

'바람이 있다면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풍족한 삶'도 아니고 '주거시설 개선'도 아닌, "고개를 하나 넘으면 명월리 군인 아파트가 있는데, 빈 병은 절대로 가져가지 않을테니 폐지를 줍도록 출입을 허용해달라"고 말씀하시던 김 할아버지.

그렇게 당신은 매일 라면으로 연명하시면서 당신보다 더 어렵게 사는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200만 원을 선뜻 내어놓으신 실버천사 김 할아버지는 물질만능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실천한 인물로 기억하게 했습니다.

올해 설 명절에 앞서 화천군의 특산품인 '산천어쌀국수'를 드리기 위해 찾아뵈었을 때도, 기름 값을 절약한다는 이유로 보일러도 돌리지 않고 생활하시는 할아버지는 "내 통장에 지금 50만 원이 있는데, 이 돈을 불우이웃 성금으로 내면 안 될까?"라는 말씀을 하셔서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습니다.

김성공 할아버지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스쿠터, 이것을 이용해 폐지수거나 이웃 마을 마실을 다니셨습니다
 김성공 할아버지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스쿠터, 이것을 이용해 폐지수거나 이웃 마을 마실을 다니셨습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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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화천 공원묘원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할아버지를 만난 곳은 다목리 콘테이너 주거시설이 아닌 '화천공원 공설묘원'에서였습니다. 일흔여덟 해의 삶을 마무리하고 한 줌의 재가 되어 묘원 한켠 조그만 공간을 차지하신 할아버지 영전 앞에서 숙연해졌습니다. 돌아가신 이유를 알기 위해 다목1리 김태영 이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난 5월 21일 폐지를 줍기 위해서 스쿠터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 같아요. 연고도 없으셔서 마을에서 장례를 치러드리고, 화장을 해서 공원묘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장님!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이장님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겠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우리 마을 어르신이신데, 장례를 더 잘 치러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뿐'이라며 말끝을 흐리십니다.

마지막 할아버지의 모습을 화천공원묘원에서 뵈었습니다.
 마지막 할아버지의 모습을 화천공원묘원에서 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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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명절 때 찾아뵈었던 내용이 <오마이뉴스>에서 '할아버지, 이제 제발 그만 기부하세요'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가 나간 이후로 할아버지께 정기적으로 쌀이나 물품을 보내오신 분들도 계시고, 멀리 미국에 사시는 어느 분은 수시로 생활용품을 보내주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스쿠터 헬멧
 할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스쿠터 헬멧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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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게 연락처를 물어서 할아버지께 물품을 보내주신 분들이야 이 사실(할아버님이 돌아가신 사실)을 알릴 수 있겠지만, 개별적으로 할아버지의 주소를 파악해 생활용품을 보내주신 분들께 연락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성의껏 작은 정성을 모아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혹여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고개 넘어 아파트단지의 폐지 수거에 대한 조치를 취해 드린 것으로 인해 그 마을로 가시다가 변을 당하신 것이라면, 그건 또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워집니다. 그러나 부디 할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에 보내드려야 했던 할머님을 극락에서 만나셔서 이승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을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원드려봅니다.


태그:#김성공 할아버지, #실버천사, #화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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