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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절 라면 사먹을 돈이 없어 종종 굶곤 했다'는 연예인의 후일담이 브라운관 속 가상현실만큼이나 허황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단돈 600원이 없어 가판대에서 들었던 신문을 도로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지갑 사정이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나는 그들이 토크쇼에서 했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그것은 음식물을 채워넣지 못함에서 오는 허기 그 이상을 뜻했다. 위장이 비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간관계와 자존감도 점점 비어갔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스물여덟살 재취업 준비생이 고시촌 쪽방 방세라도 벌어보고자 임시방편으로 들어간 곳은 동네 피자가게. 걸어서 5분, 뛰어서 3분이면 충분한 거리에, 주4회 하루 4시간만 일하면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돈 없으니 백 단위는 빼자고? 그럼 안 되죠

주업무는 홀서빙과 걸려오는 전화 주문 받기. 일자체가 단순하고,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장이 크게 붐비지 않아 노동강도도 낮았다. 취업면접이 있는 날이면 화끈하게 알바시간 조정까지 해주시는 사장님에 밥때 식사는 물론 쉬는 시간 틈틈이 간식거리 챙겨주시는 자상한 주방장님까지.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내 인생 최고의 알바였지만, 단 한 가지 힘든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전화 주문 받기. '핫소스 100개 주세요'처럼 황당한 주문은 없었지만, 그래도 전화기 건너편 '얼굴 없는' 고객의 말을 똑바로 알아듣는 데에는 항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됐다.

이곳에서 알바를 하기 전, 나는 이 세상 모든 전화 주문이 다음과 같이 매끄럽게,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았다.

알바생: "○○○ 피자입니다."
고객: "○○동, ○○○-○ 번지, ○○빌라, ○층 ○호인데요. 슈퍼디럭스 피자 라지 한 판이랑 콜라 큰 거 하나 갖다주세요."
알바생: "주문 확인하겠습니다. ○○동 ○○○-○ 번지 ○○빌라 ○층 ○호, 슈퍼디럭스 라지에 콜라 1.25L 한 병 맞으시죠?"
알바생: "네. 고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자를 주문하는 고객의 수만큼이나 피자를 주문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었다. 전화 끊기 전에 '맛있게 해와요'라며 애교 섞인 콧소리를 덧붙여 절로 웃음짓게 만든 이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 일색에 무시하는 말투로 미간을 찌푸리게 한 이도 있었다.

'피자를 주문하겠습니다. 불고기 피자 라지 사이즈 한 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해 날 당황케 했던 외국인 유학생, 막무가내로 '콜라를 서비스로 주지 않으면 피자를 시키지 않겠다'던 동네 삼계탕집 사장, '돈이 없으니 백원 단위는 절사합시다'라며 힘없는 알바생과 가격협상을 시도하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도 있었다.

'각자의 스타일이 다를 뿐, 결국 고객이 원하는 것은 피자와 음료수'라는 당연한 진리를 깨달아가면서 내 업무 능력도 점점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 고객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쏟아내는 주소를 받아적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주소... 받아적기 너무 어려워

알바생이 체감하기에 '○○동, ○○○-○ 번지, ○○빌라, ○층 ○호'와 '○○동○○○-○번지○○빌라○층○호'는 천지차이다. 마치 전화 받는 알바생이 자신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을 들고 자신의 집에 찾아온 적이 있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듯, 적지 않은 고객들이 주소를 랩처럼,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읊곤 했다. 그럴 때면, 전화기 너머로 튀어나온 주먹에 머릿속을 빠르게 강타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신만고끝에 받아적은 주문내역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주문서를 출력해 주방에 넘긴 후에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내가 주문 받은 피자를 배달하고 온 종업원이 가게로 웃으며 들어오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가령, 내가 주소를 틀리게 받아 적어서, 혹은 고객이 틀린 번지수를 불러주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도착한 배달원이 고객과 통화 후 제대로 된 주소로 다시 배달을 가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예측 가능한' 실수 말고도 다양한 돌발상황이 발생한다는 데 있었다.

입구문이 비밀번호로 잠겨 있으니 건물 앞에 도착하면 전화를 달라고 해놓고서는 고객이 잠들어 버리거나, 모르는 번호라며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밖에 나가 있는 배달원뿐만 아니라 가게 안도 한바탕 난리가 난다. 도착한 집에 아무도 없어 배달원은 대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막상 고객에게 전화를 해보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제가 지금 퇴근하고 가고 있는 중인데요. 중간 지점에서 만날까요?'라는 '무심한듯 무시무시한' 대답이 돌아온 적도 있었다.

알바생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신분상승'에 성공하면서 정든 피자집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됐다. 이제는 평소 두 번 하던 콜라 리필을 한 번 하게 되고, 행여라도 바닥에 옥수수콘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며 피자를 베어 먹게 된다.

이런 행동의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냥 그렇게 되네'란 대답 밖에는. 하지만 전화로 음식을 시킬 때 예전보다 천천히, 또박또박 주소와 음식명을 말하게 된 이유는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다. '전화기 너머에 주문받는 기계가 아니라 노동자가 있다'는 교훈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태그:#알바, #전화주문, #피자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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