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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학생 시절 '운동'이라는 것을 하던 사람들 곁을 얼쩡거리며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던 고단한 노동자의 삶들. 언제나 정해진 것 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밤새워 해야했던 토론이나 세미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고, 그 이후로도 그럴 것 같았다. 지치기도 하고, 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대학원에 갔다.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이론에서 구해보려 했다. 깔끔하고 명쾌한 논리로, 정곡을 꿰뚫는 서술로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은 그러한 열정이 다 식어 버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나의 한계를 인정할 줄도 안다.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오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능력이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겸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나는 잊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그들', 한때는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언제나 내 주위에서 아픈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노동자들을 말이다.

김진숙, 잊었던 현실을 내게 알려줬네

김진숙, 부끄럽게도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마도 몇 번쯤은 신문에서 보았음직 한데, 심지어 어떤 노동자가 한진 중공업의 구조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그 이름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가 고달픈 싸움을 하는구나, 힘들겠구나, 어떻게 되겠지, 이런 따위의 생각만이 내 뇌리에 남겨졌을 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변화, 좀 더 정확히는 한국 정치의 변화가 내 이런 망각에 한 몫을 담당했을런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 뭔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해도 괜찮았고, 상대적으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한때 내가 당원이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의 1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에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맡겨 놓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가 묻는다. 기륭전자나 KTX의 여승무원들, 이랜드나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 그 밖에 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못 본 채 지나치던 내 가슴에, '비정규직'이라는 고통스러운 직함이 한국 사회에 700만, 800만을 넘어서는 동안에도 그저 무덤덤하게 '어, 이거 어떡하지' 정도로, 나의 일로 여길줄 모르던 내게 묻는다. 전태일이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이 땅의 노동자가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그들이 너와 함께 살고 있느냐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름대로 힘들었던 20대와 30대 초반을 보상받고 싶었다. 역시 운 좋게도 나는 취직을 했고 (그것도 물경 '교수'라는 직업을 얻었다), 결혼을 하고 예쁜 딸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가 돼 본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나의 아이는 내 삶의 새로운 의미가 되었고, 저녁마다 보는 아이의 새로운 모습은 나를 '행복한 바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보았다. 몇 년 전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한진 중공업 김주익이라는 분의 딸이 "일자리를 구해 줄테니, 아빠, 그만 돌아오면 안돼"냐고 쓴 일기를 말이다. 그들에게는 행복해질 권리가 없는 것일까.

부디, 무사히 내려오길

얼마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이 시대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도둑, 아니면 바보"라는 것인데, 오랫동안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지금 내 가슴이 조금은 아픈 것을 보면 나는 바보 보다는 도둑에 가까운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도둑, 남이 애써 만들어 놓은 것을 그에 합당한 고된 노동도 하지 않고 훔쳐가는 도둑, 그들의 고통과 눈물로 만들어진 단물을 맛있게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도둑. 그에 가까운 삶을 적어도 지난 몇 년간 살았음을 나는 비로소 참회한다.

이런 나약한 반성문을 김진숙씨가 보아주기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섯 달이 넘도록 그가 매일 연습했다던가. "부디 무사히 내려와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는 아직도 그가 할 일이 너무 많고,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 '희망의 버스'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소금꽃나무>에서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희망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희망을 모아 이에 화답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게으르고 무기력한 나도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부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최아무개씨는 방송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진숙, #조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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