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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저 아저씨는 왜 누워 있어?"

"누구?"

"저기…."

"아… 저 아저씨, 아니 저분은 있잖니…."

 

네 살배기 둘째 딸아이가 누군가를 가리키며 묻는 말에 '뭐, 별 거겠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무심코 고개를 돌려봤다가, 순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아이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우리 가족이 하루 묵을 숙소인 충북 진천군 깊은 산속에 있는 천주교 배티순교성지(이하 배티) 내 '양업영성관'으로 향하던 언덕길 아래였다. 그곳에는 뉘엿뉘엿 지는 햇빛을 온몸에 맡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표현한 조형물이었다. 이를 먼발치에서 본 네 살 된 딸아이가 아빠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순간, 난 천주교 신자도 아닌 데다가 종교 역사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만을 알고 있어 당황했다. 어린 딸아이에게 간단, 명료하게 현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 이때 옆에 있던 아내가 설명을 짧게 해줬다.

 

휴~ 아이가 엄마의 설명을 얼마큼 이해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얼마나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아이에게 뭔가 대답해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발길을 옮겼다. 또 더 이상 아이로부터 이어지는 질문이 없었고, 난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뒤, 숙소에 간단히 짐을 넣어놓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식당을 찾아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때였다. 어? 이번에 맞닥뜨린 인물(?)은 좀 더 난해했다.

 

앞서 차를 타고 지난 길이었으나 미처 자세히 못 봤던 인물상이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양반네 모습을 한 인물의 동상, 그 분을 본 순간 역시나 피할 수 없는 딸아이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엔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아이였다.

 

"누구예요?"

"어… 글쎄…."

 

이번엔 엄마조차 별다른 설명을 못했다. 그분이 누구인지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다.

 

'2인자'라서 빛나지 못한 최양업 신부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

 

우선, 동상 아래에 소개된 설명글을 봤다. 이분, 신부님이다. 우리나라 제2대 신부란다. 이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하면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인물은 바로 김대건 신부님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해외에서 사제 서품(1845년 8월 15일)을 받고 귀국한 지 만 1년도 안 된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로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실제로 선교활동을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순교'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분이시다.

 

반면, 최양업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사제 서품을 김대건 신부가 먼저 받아 간발의 차이로 '최초의 신부'란 타이틀을 놓치고 제2대 신부란 위치에 올랐던 것(뭐, 예나 지금이나 1등만 기억하는 OOO 세상이다 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봤더니, 최양업 신부님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 김대건 신부님보다 어쩌면 더 큰 역할을 했고,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웠다.

 

그런 분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배티였던 것. 이런 곳에서 우리 가족이 하루를 묵는 뜻깊은 기회를 얻게 됐다고 하니, 느낌이 남달랐다. 마침 동행했던 분께 들으니, 배티는 종교인들에게 매우 성스런 곳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같이 무신론자도 이곳에 서니 숙연해지고 경건해지는, 뭔가 끌리는 힘이 느껴졌다. 전문용어로 '성령'이 가득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발걸음을 더 옮기니, 눈앞에는 십자가의 길이 나왔고 그 옆으로는 작고 아담한 작은 성당이 처음 찾은 낯선 손님을 반기고 있었다.

 

배티에서 보낸 하룻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인 영성관으로 돌아왔다. 이미 해는 졌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이라서인지 창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우리 가족을 하루 쉬게 해준 이곳 배티는 '힐링(Healing)', 즉 '치유(治癒)'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고 해서 찾은 곳이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도심 속 생활에 찌든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를 멀지 않은 자연 속에서 온 가족이 함께 하며 푸는 것이었다(실제로 서울에서 불과 1시간 30여 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배티순교성지 영성관에서 머물 수 있다. 단 사전에 미리 예약만 하면 이용할 수 있다).

 

그 바람이 배티에서 이뤄졌던 것. 처음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배티에 반했다.

 

'고요'란 무엇인지를 몸으로 굳이 느끼려 하지 않아도 폐부 깊숙이 전해지는 곳이다. 또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서 있으면 자연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내가 느낀 배티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요즘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힐링 캠프'를 열고 유명 연예인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란 타이틀을 달았던 것 같던데. 마치 내가 그 힐링의 장소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이곳 배티에서 받았다.

 

그랬기에 배티에서 맞이한 초가을의 시간은 다른 여행과 달랐다. 보통 눈과 마음이 즐거우면 되는 여행이었는데, 배티에서는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간 여행이었다. 도시에 살면서 일과 생활의 바쁨에 쫓겨 찌들었던 영혼의 치유 시간을 보냈다고 할까.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 만난 김웅렬 배티성지 주임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땀과 신앙이 어려 있는 곳이 배티성지이며, 이곳에서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졌고, 한국 가톨릭의 효시가 됐다"면서 "무엇보다 순교자의 본향으로, 특히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장소로서 영성의 뼈대가 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신부는 "누구나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면서 "이곳 배티에 와 있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씀에 덧붙여 김웅렬 신부로부터 직접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의미 있게 배티가 내게 다가왔다.

 

한편, 어른인 나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아이도 즐거웠나 보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배티에 다시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아이에게도 단순한 즐길거리 여행이 아니라 맑고 좋은 공기를 갖춘 자연환경에서 보낸 시간이 특별했나 보다. 특히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지낸 시간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 듯했다.

 

더구나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디지털 기계 문명에서 벗어나 과거로 시간 여행이었다. 좀 어려운 역사 이야기지만, 천주교 박해의 역사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눈과 마음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됐으리라.

 

두 딸아이는 새까만 밤하늘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별빛들을 보며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을 열었을 때 첩첩산중 차령산맥이 안개 낀 한 폭의 산수화로 눈앞에 펼쳐졌다. 무엇보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맑은 공기는 결코 도심에서 숨쉴 수 있는 공기가 아니었다. 마음이 뻥~ 뚫리는 그 신선한 느낌, 얼마만이었는지…. 이 모든 것을 가족이 함께 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난 후 큰딸아이가 퇴근한 내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빠, 배티성지에 데리고 가줘서 고마워요!"

"어… 그래…."

"저, 배티가 정말 좋아요. 또 데리고 가주세요."

 

이런 말을 듣고서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마음이 넘쳐났다.

 

'배티', 보는 곳이 아닌 느끼는 곳

 

"나는야 배티가 좋아!"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여가 지난 지금도 큰딸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도심에 있는 놀이동산보다도 배티가 좋다고 한다. 그곳에서 아빠와 함께 잡았던 개구리와 방아개비, 잠자리가 생각난다고 하며, 네 명의 가족이 손잡고 걸었던 그 조용한 길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나 역시도, 짧은 1박 2일이란 시간이었지만 배티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비롭고 영험한 체험이었다. 보는 여행이 아닌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여행이었다고 할까.

 

무엇인가 내 안에 있는 현실에 대한 고뇌나 문제를 잊고, 나도 모르게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 생과 사를 넘나드는 핍박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널리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숨결을 느끼고 왔다. 지금도 잠깐 눈을 감고 그 옛날 삼박골 비밀교우촌(배티 인근)에서 삼삼오오 모여 신분의 억압을 벗어던지고 '평등'이란 현실을 꿈꾸고 기도했던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쿵쿵 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의 존경받는 '서민을 위한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배티에 깃든 최양업 신부와 함께 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비록 시대와 장소, 상황은 좀 다를지 몰라도 자신의 탐욕과 권력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있다. 무엇보다 '평등 세상'을 꿈꾸는 간절한 마음이 선거를 앞두고 커진 지금, 배티가 주는 의미는 컸다.

 

많은 이들의 마음, 소신을 갖고 신념(그것이 종교를 포함한 그 어떤 것이더라도)을 지켜나가는 숭고한 정신이 배티 안에 있었다.

 

배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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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창재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최양업(1821~1861) 토마스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이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와 북만주의 팔가자 등지에서 공부한 뒤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후 한국인 성직자로는 처음으로 요동 땅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했으며, 귀국한 뒤로는 12년(정확히 11년 6개월) 동안 선교활동에 힘썼다.

 

그는 험한 산골을 돌아다니면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찾아다녔는데,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회했다. 평균 1년에 7천리 이상 120여 개 교우촌 공동체를 찾았고,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신자들을 찾아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결국 40세의 나이에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과로로 선종하게 된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업적들이 '선종 150주년'을 맞아 조금씩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하고 있다. 기념성당 건립을 비롯해 세계적인 힐링 장소로 만들기 위해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노력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와 배티성지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곳 배티에 와서 직접 배워봄이 어떠할지. 굳이 내가 그 이야기를 다 풀어버리면, 혹시나 찾아가실 분들에게 배티가 주는 즐거움을 감소시키지 않을까 하는 배려 차원이니 널리 이해해주시길...

 

특히 배티순교성지 담임신부인 김웅렬 토마스 신부께 직접 우리나라 최초 가톨릭 유학생인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 들어보는 귀한 경험을 해보시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충북 진천군에 있는 천주교 배티순교성지에 다녀온지 좀 시간이 지났지만, 뒤늦게 소개하는 것은 요즘 한참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불거지는 각종 비리와 부도덕한 모습을 보면서 배티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을 처음 우리나라에 널리 전파시킨 최양업 신부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그토록 바랐던 '평등'을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배티에 가서 몸과 마음을 씻고 오고 싶네요. 


태그:#배티순교성지, #김웅렬, #배티, #충북 진천,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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