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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과 투표 용지를 챙기는 디히터 마틴 부부.
 신분증과 투표 용지를 챙기는 디히터 마틴 부부.
ⓒ 한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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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놈이 이긴다고, 독일 사람들 정말 꾸준히 월요 시위를 해왔다. 퇴근한 직장인들, 저녁식사 준비 마치고 급히 나온 가정주부들, 학생들 등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슈투트가르트 중앙역을 다시 짓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30분이 되면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에 모여 시위를 했다.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꼬박꼬박 모여서 한 시간 정도 시위하는 독일인의 인내심과 질김, 꾸준함!

건설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베어내는 중앙역 주변 공원의 나무들을 지키기 위해 아예 나무 위에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마련한 사람들. 가끔 그 공원을 지나가다 보면 공원에 숙소를 마련한 사람들이 여유롭게 요가를 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몸뚱이와 일상생활 양식으로 저항 의식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시위 양상이었다.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각자 개인 생활이 있는 시민들은 일상생활을 착실히 하면서 그냥 딱! 그 시간만 되면 하던 일들을 손에서 내려놓고 시위 현장으로 나왔다.

2년 넘게 꾸준히 이어진 반대 시위

인내, 여유와 헌신으로 2년여 동안 지속된 월요 시위는 독일에서도 '고집불통, 보수'로 찍혀 있는 슈바벤(슈투트가르트 지역 사람을 일컫는 별명)들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그 결과 슈바벤들은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정부의 집권당을 진보정당으로 교체하는 파격적 선택을 했다(<일 원전 재앙, 독일 집권당을 울리다> 참조).

그렇게 정권을 교체한 결과,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찬반 주민투표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집권당인 녹색당과 연정 파트너인 사민당이 밀고 당기며 내린 정치적 결정이다.

11월 27일(현지 시각) 일요일 아침 일찍 디히터 마틴의 집을 방문했다.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월요 시위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50세 생일 파티까지 시위 현장에서 할 정도로 열성파인 디히터 마틴이 주민투표를 하는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보수' 지지하던 구두쇠들도 뿔났다> 참조).

디히터 마틴의 막내딸 레아는 엄마 아빠가 투표하러 갈 준비를 하는 동안 설거지를 했다. 큰딸 스펜냐는 계단을, 아들 요나단은 거실을 청소했다. 약간의 긴장감이 도는 표정을 한 디히터 마틴에게 주민투표 결과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물었다. "긴장된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기다려온 주민투표다.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인 주민투표가 실행된다는 데 일단 의미가 있다. (이번 투표는) 앞으로도 시민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큰 프로젝트나 중요한 결정 사항이 있으면 주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엄마 아빠가 선거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설거지를 하는 막내딸 레아.
 엄마 아빠가 선거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설거지를 하는 막내딸 레아.
ⓒ 한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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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주민투표이니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승복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디히터 마틴은 이렇게 답했다.

"일단 이번 주민투표에서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다. 우선 주민투표가 성립되려면‚ 유권자의 1/3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 둘째, 이번 주민선거에는 슈투트가르트만이 아닌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사는 모든 사람이 참여한다. 시골에 사는 분들이 얼마만큼 관심을 갖고 투표를 할지 의문이다.

셋째,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를 주민들에게 직접 묻는 것이 아니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정부가 슈투트가르트 21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재정 분담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투표다. 결과적으로 '찬성'이라고 답하면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것이고, '반대'라고 하면 건설 프로젝트에 찬성하는 것이다. 질문이 복잡하고 (프로젝트 실행 여부와) 대답이 반대여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린다. 투표 참여율이 높으면 그 결과에 승복할 것이다. (그러나) 투표참여율이 낮다면... 그건 더 생각해 봐야겠다."

다음으로 선거를 마치고 나오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헤르만 파트릭과 싱가포르 출신 부인이었다. 이들은 슈투르가르트 21에 대한 찬반을 묻는 질문에 "당연히 건설은 계속돼야 한다. 지금까지 투자된 돈도 아깝고, 슈투트가르트의 얼굴인 중앙역이 현대화되는데 왜 반대해야 하나"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출신 부인은 "난 독일 국적이 없어서 투표권이 없다. 진짜 주민투표라면 국적과 상관없이 이곳에 오래 산 주민들에게 모두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며 투표권 문제를 제기했다.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찬성한다는 헤르만 파트릭 부부.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찬성한다는 헤르만 파트릭 부부.
ⓒ 한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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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의견이 다른 부부도 만날 수 있었다. 라인 미카엘 부부였다. 남편은 건설에 반대했지만 부인은 찬성했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 부부싸움을 하는 일은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 부부는 "슈투트가르트 21 말고도 부부싸움을 할 거리는 충분히 많아요" 하며 즐겁게 웃었다. 한 이불 속에 두 마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모습이었다.

2년간 휴가 기간만 빼놓고는 월요 시위에 매번 참가했다는 되플러 미카엘은 예쁜 딸과 함께 투표하려 왔다. 서로 안면이 없던 되플러 미카엘과 디히터 마틴은 투표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정치 참여는 이렇게 사람들을 새로 만나게도 하고, 헤어지게도 한다.

투표소에서 처음 만난 되플러 미카엘과 디히터 마틴 부부. 이들은 선거 결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투표소에서 처음 만난 되플러 미카엘과 디히터 마틴 부부. 이들은 선거 결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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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의 승리, 아쉬운 결과

취재도 좋지만 내 식구도 챙기자 싶어, 옆집에 사시는 시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평생 기민당만 찍다가 이번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 때문에 처음으로 녹색당을 찍으셨다는 시아버지에게 찬반 어느 쪽에 투표할 것인지를 여쭸다. 시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Nein(반대)"라고 답했다. "중앙역이 새로 건설되는 것에 반대하시면 Ja(찬성)에 투표하셔야 해요." 이렇게 한 다섯 번쯤 설명 드렸는데도, 시아버지는 끝까지 아니라고 하셨다. 계속 "Nein(반대)"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아버지는 당당히 Nein(반대)에 한 표를 던지셨다!!! 역시 고집불통 정통 슈바벤이시다.

이 에피소드를 디히터 마틴에게 말했다. 디히터 마틴은 이번 주민투표 질문이 꼬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린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슈투르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를 찬성하는 이들 중에도 내 시아버지처럼 헷갈린 이가 꼭 그만큼만(즉 프로젝트에 반대하는데 실제로는 찬성한다는 쪽에 투표한 사람만큼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요일 오후 6시에 투표가 끝나고 드디어 개표가 시작됐다. 투표 참여율은 48.3%였다. 그중 58.8%는 지방정부가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재정을 부담하는 것에서 손을 떼는 것에 반대했고(즉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 찬성), 41.2%는 찬성했다. 결국 주민들은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가 계속되는 쪽을 택했다.

독일 신문과 TV는 충격적인 선거 결과라고 대서특필했다. 지난했던 그간의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주의 집권당인 녹색당의 크레취만 윈프레드 총수는 "결과에 승복한다. 시장으로서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를 책임 있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오후 6시에 투표가 마감된 후, 월요 시위대는 하나둘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으로 모여 결과를 기다렸다.
 오후 6시에 투표가 마감된 후, 월요 시위대는 하나둘 슈투트가르트 중앙역으로 모여 결과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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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시위대 모임 장소에 저녁 8시쯤 찾아갔다. 그곳에 모인 시민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강요한 것도 아닌 시위와 집회에 2년여 동안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의 실망감이 느껴졌다. 정중히 인터뷰를 요청했다.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도저히 못하겠다고 몇몇 사람이 사양했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준 뒤르 귄터는 지난 2년간, 매주 빠짐없이 슈투트가르트 21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결과를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슬프다. 도덕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법적으로는 인정한다. 주민 다수가 슈투트가르트 21 건설을 원한다고 대답한 것이지, 그 건설을 관통하고 있는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옳다고 답변한 것은 아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 원칙이고 그런 면에서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뒤르 귄터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결과를 인정한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주민투표를 보며, 다수결이 민주주의 원칙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다른 월요 시위 참가자는 헌법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 주민투표에서처럼 질문이 꼬여 유권자를 헷갈리게 만든 이유가 지방정부와 연방정부의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즉 지방정부는 연방정부에서 시행하는 프로젝트 자체를 폐기하거나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 시위 참가자는 이런 헌법적 조건에서는 그 지방에 건설되는 중앙정부의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지방정부가 건설 재정 부담을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를 주민들에게 묻는 변형된 방법뿐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이라는 틀이 주민투표가 민주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틀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시민은 "다수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졌다. 이 시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허탈해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결정한 것도 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이었다. 히틀러도 독일인 다수의 결정으로 총통이 되었다. 이번 주민투표를 통해 배운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올바르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과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것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2년간 시위를 해서 얻어낸 주민투표가 이런 식의 절반의 승리로 끝날 수 있다." 

다수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찬반 의견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일방적 행정 처리 방식에 대한 월요 시위대의 문제제기, 그리고 국민의 세금이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관철되는 건설 프로젝트보다는 시민 생활과 밀접한 교육·의료 분야에 쓰여야 한다는 비판은 독일 정치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다.

또한 '다수의 결정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 하는 한 독일 시민의 질문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모든 국가의 시민이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다. 다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각국에서 합법적 야만의 행태들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국회에서도 얼마 전 여당이 다수를 앞세워 한미FTA를 통과시키지 않았는가(이 글을 쓰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FTA 비준안에 서명했다는 기사가 떴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강조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올바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주는 전제조건들에 대한 고민과 모색, 다수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보 공개와 소통 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다수결은 악용될 소지가 충분하다. 지난 역사에도 그렇게 악용된 사례가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은 민주주의이지 다수결 원칙이 아니다.

월요 시위 참가자들은 비틀즈의 노래 '이매진(Imagine)'을 부르며 허탈감을 서로 위로했다. 다른 한쪽에선 슈투트가르트 21 건설 프로젝트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퀸의 '우리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을 부르며 자축했다. 두 노랫소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태그:#슈투트가르트 21, #독일, #주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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