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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아룬의 가파른 층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
▲ 방콕의 빛과 그림자 왓아룬의 가파른 층계를 올려다보는 사람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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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의 첫날, 아침부터 사고가 났다.

눈을 떴을 땐 천정에서 팬 선풍기가 돌아가고, 거리 쪽으로 난 창으로부터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의 온갖 탈것들의 소음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서는 끈적거리는 땀이 묻어났다. 아, 방콕이구나, 비로소 여행의 시작을 실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차 한 잔을 탈 때였다. 똑똑. 다급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이모! 삼촌! 일어났어요?"

잠깐. 촌수가 좀 이상한가? 실생활로나 법적으로나 우린 틀림 없는 부부이므로 이모와 이모부이거나 삼촌과 숙모라야 제대로지만, 아이들과의 관계가 '이모의 남편'이나 '삼촌의 아내'가 아니다 보니, 촌수가 좀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별로다. 여행 중에는 가이드나 교사의 입장보다는 '함께 여행하는 여행자'이고 싶어서다. 그러니 촌수가 이상해도 할 수 없다. 부디 독자들도 이해해 주시길.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 아, 희경이! 순간 새벽 일이 떠올랐다. 전날 우리 일행은 많게는 다섯 개의 공항을 거쳐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탔었다. 이곳 방콕의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 있었고, 희경이가 고열을 호소했었다.

얼음찜질을 하고 성호와 에어컨 방으로 바꾸면서 좀 진정되는 것 같았는데, 밤새 더 나빠진 것일까? 얼른 문을 열었다. 희경이와 같은 방을 쓰는 윤미가 서 있었다.

"왜? 희경이가 아파?"
"아니, 삼촌 그게 아니고요, 희경이 카메라가 없어졌어요."

윤미는 지난 새벽 희경이가 카메라를 방까지 가지고 들어온 걸 봤단다. 그런데 아침에 짐을 싸다 보니 없더란다. 새벽에 희경이가 아플 때 방문을 열어두고 다른 방의 친구들에게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 사라진 것 같다는 것이다. 고가의 카메라인데다, 희경이가 이모부께 빌려온 거란다. 

하지만 매니저에게 말해보는 것 이상으로 별 도리가 없다. 직원들을 의심하는 꼴이 되니, 우리도 조심스럽고 듣는 쪽에서도 불쾌하다. 새벽에 근무한 직원들에게 물어보겠단다. 저녁까지 찾지 못하면 경찰에 분실 신고를 하기로 했지만, 여행지에서 사라진 물건을 다시 찾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다만 여행이 끝나고 여행사로부터 얼마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첫날부터… 속상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뿐이다. 카메라가 사라졌어도, 들뜬 웃음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카메라는 카메라고, 여행은 여행이다. 이럴 때마다 세상에 현명한 것은 아이들이고, 또한 단순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트에서 본 왓아룬
▲ 차오프라야 강의 새벽 사원 보트에서 본 왓아룬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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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카메라일 뿐, 여행은 즐겁다

첫 방콕 시내 투어의 날. 차오프라야 강이 보이는 작은 공원에서 처음으로 '돈'을 나누어주었다. 방콕에서 지낼 이틀 동안 쓸 여행비용이다.

"지금부터는 모둠끼리 알아서 환전하고, 밥 사먹고, 각자 취향에 맞게 사원이든 미술관이든 시장이든 볼거리를 찾아다니는 거다? 알겠지?"

아내가 모둠별로 미국 100달러짜리 고액권 지폐를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마냥 좋아할 것만 같던 아이들의 눈에 의외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생겨났다. 저 눈빛은 또 뭘까…? 낯선 도시에서의 두려움? 아니면, 자유에 대한 어떤 책임감? 그 무엇이든 내 가슴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참 어렵다. 믿어주는 것 말이다. 낯선 도시 낯선 거리에서 아이들을 믿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그날도 보석사기 등 방콕에서의 주의사항 몇 가지만 일러준다는 것이 아침의 카메라 분실사건 때문인지 말이 많아졌다. 분명 불필요한 염려와 안내 혹은 개입이 끼어들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자유를 주고, 또 안전을 위해 어떤 것에 제한을 두어야 하는지, 그 경계가 흐리고도 아프다.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으면,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그게 쉽지가 않다. 기다리는 것과 나서는 것 사이에 수만 가지의 생각과 길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왓아룬에서
▲ 와우...! 왓아룬에서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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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면 내일까지 쓸 돈이 모자랄지도 몰라!

수상버스를 탔다. 일단 차오프라야 강을 거슬러 '왓아룬'까지는 다함께 가기로 했다. '왓'이 사원이고 '아룬'이 새벽이니, '왓아룬'이란 새벽사원이다. 새벽이 아름다운 사원이거나, 차오프라야 강에 새벽을 알리는 사원이거나, 그곳 꼭짓점에서 내려다 보는 차오프라야 강과 방콕의 풍경은 아이들에게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시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오면서부터 본격적인 방콕 투어가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모둠 여행이다. 모둠은 세 개고, 각 인원은 네 명 혹은 다섯 명이다. 저녁 때 '동대문(카오산에 있는 한국음식점)'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환전소로 향하는 아이들이 있고, 벌써부터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거나 군것질거리로 직행하는 아이들도 있다.

다시 입이 근질거린다.

'그 환전소는 환율이 나쁜 것 같아… 똑같은 물건도 기념품점이 시장보다 더 비싸단다… 그렇게 벌써 군것질을 해대다간 내일까지 쓸 돈이 모자랄지 몰라…'

할 말이 차곡차곡 목구멍을 채워가지만, 참는다. 이제 그들의 몫이고 그들의 선택이니까.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이상했다. 왠지 우리 부부만 왕따가 된 것 같은 기분.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우리 둘만 남으면 홀가분할 것 같았는데. 다들 어디로 갔을까, 아내도 나도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왓포사원'에 들어갔더니 윤미, 희경, 성호, 승현이가 있다. 헤어지고 겨우 한 시간인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심전심인지 녀석들도 강아지들 마냥 뛰어와서 참새처럼 재잘거린다.

"이모! 삼촌! 여기 댑따 좋아요!"
"저 안에 엄청 큰 불상이 누워있어요."
"그런데 여기 공짜예요, 입장료도 없어요!

그렇지, 여기 '와불상'이 유명하지, 그런데… 뭐, 공짜? 아니다. 오늘이 태국 국왕의 생일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녀석들이 나온 곳은 태국 사람들만 드나들도록 되어있는 옆쪽으로 난 문이다. 여행자가 입장하는 문은 앞 쪽에 있고, 당연히 입장료가 있다.

녀석들에겐 군것질을 맘껏 하고도 보고 싶은 것 다 관람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던 셈이다. 그 이름 하여 단순, 그리고 무지.

왓아룬에서
▲ 아이들 왓아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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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아룬에서
▲ 우리의 소원은.... 건강 그리고 안전 왓아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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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를 튀긴 면에 부워... 그 맛 색다르네

이번에는 사원을 나와 왕궁 쪽으로 걷다 보니 큰길 건너편에 상훈이네 모둠이 보였다. 다리가 아픈지 왕궁 담벼락 아래 길바닥에 중학교 3학년 동갑내기 도솔이와 정호, 1학년 동갑내기 영준이와 수경이가 퍼질러 앉아있다. 더위에 지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쪽은 왕국 출입구 쪽이 아니었다. 소리를 질러 일러줄까 하다가, 또 그만둔다. 되돌아가는 것도 다리품을 파는 것도 이제 다 저 아이들의 팔자고 몫이다. 아이들에겐 스스로 여행하는 일이 어렵고, 우리 부부에겐 스스로 여행하는 녀석들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 어렵다.

차라리 보지를 말고 만나지도 않는 편이 낫겠다 싶어, 관광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다. 아내가 인터넷 동호회에서 체크해둔 코코넛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가보기로 한다.

어느새 길은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었고, 집들은 적당히 낡고 적당히 낯설었다. 아이스크림 맛은 별로였지만,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손님 하나 없이 한가한 이발소와 그 앞에 세워진 기름때 절은 스쿠터, 그리고 그 옆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고집스런 인상의 노파…. 비로소 여행자의 감성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제야 아이들의 가이드가 아니라 우리도 한 명의 여행자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음엔 식당을 하나 찾아들어갔다. 영어로 된 메뉴가 없는 걸로 보아 현지인들을 위한 식당이다. 사진과 옆 사람의 요리만 보고 대충 시키자, 해물 튀김국수가 나왔다. 라면처럼 뽀글거리는 튀김 면과 해물이 든 소스가 따로 한 그릇씩이다. 소스를 튀긴 면에 부어서 먹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방콕의 거리에서
▲ 해물튀김국수 방콕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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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의 거리에서
▲ 해물튀김국수 2 방콕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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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낯선 거리, 낯선 식당, 낯선 음식에 잘 적응하고 있는 걸까? 음식점은 제대로 찾아들어갔을까? 그리고 향신료 강한 이 나라 음식이 입에는 맞는 걸까? 빵이나 햄버거 등으로 때우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오후에는 기차표 등의 일처리 몇 가지 하고나서 '동대문' 앞으로 갔다. 아이들은 신이 나 있었다. 벌써 '히피형 몸빼바지'와 조리를 사 입고 온 아이도 있고, 우리를 보고 "이모! 삼촌!"을 외치며 폴짝폴짝 뛰는 녀석도 있었다. 그들의 하루가 어떠했을까, 궁금했다. 재미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삼촌, 우리 오늘 엄~청 걸었어요."
"다리 아파 죽겠어요. 지인~짜예요."
"우리 모둠은 시장만 4개 구경했어요."
"카오산 로드, 볼 거 진짜 많아요."
"사고 싶은 거 대빵 많았는데, 돈 아까워 안 샀어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던가 보다. 한 모둠은 시장만 네 군데 돌아다녔다 하고, 한 모둠은 왕궁에 갔다가 출입구를 못 찾고 헤매는 동안에 영준이가 아파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쉬었다가 카오산 로드를 구경한 모양이다. 또 한 모둠은 미술관에 갔다가 역시 카오산 로드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한 모양이었다.

방콕의 아침, 한가한 시간
▲ 아, 방콕 방콕의 아침, 한가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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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서희
▲ 어린 여행자 막내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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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둠의 공통점은 다들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다리가 아프면 '툭툭'을 타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그건 아직 무서워서 못 타겠단다. 여기저기서 호객을 해대니까, 엄두가 나지 않은 모양이다. 밥은 뭘 사 먹었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핫칠리 뭐라켔는데… 아, 이름은 몰라요. 근데 별로 맛없었어요."
"하영이 언니하고 나운이 언니는 냄새가 이상해서 하나도 못 먹었어요."
"나는 쌀국수요."
"우리 모둠은 이슬람식당에 갔는데, 코코넛주스만 빼고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결국 나의 기우였다. 아이들은 낯선 길이든 낯선 음식이든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물론 김치가 그리워 벌써 한국식당에 발을 들여 된장찌개를 먹은 모둠도 있었고, 입맛이 맞지 않아 군것질로 대신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여행 첫날부터 용감하게 이방의 세계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저토록 시끄럽게 떠벌려대는 것도.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등이 있다.



태그:#라오스여행학교, #방콕,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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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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