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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서 가장 출중한 문인을 딱 세 사람 꼽고, 그렇게 선정한 까닭을 말해보라. 이런 문제를 만약 시험장에서 접했다면, 누구를 뽑을 것인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 <어부사시사> 등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낸 명작 시조들을 창작한 윤선도,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같은 주옥의 가사문학을 꽃피운 정철…. 

 

정철은 한국문학사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대가다. 문학도가 아니라도 송강 정철(1536∼1593)을 기리는 사당 정송강사(鄭松江祀, 충청북도 기념물 9호)와 그의 묘소(기념물 106호)는 누구나 한번쯤은 답사할 만한 역사 여행지다. 특히 정송가사와 묘소가 김유신 유적 가까이 있으므로, 진천을 찾아온 답사자라면 정철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정송강사가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처음 지어진 것은 1665년(현종 6년)이다. 본래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신원동에 있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사당도 세웠다. 그후 1979년부터 1981년까지 3년에 걸쳐 중건했는데, 지금 보는 것은 이때 지은 건물들이다.

 

보이지도 않고 뜻도 알 수 없는 신도비의 내용

 

그의 묘소는 정송강사 서쪽 산능선에 있으니 근처에 신도비(神道碑)가 없을 리 없다.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87호)는 묘소로 안내하는 비석이다. 정철 신도비는 정송강사로 들어가는 홍살문 옆에 있다. 물론 비각을 씌워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해뒀다.

 

비각 안의 신도비를 들여다본다. 거북받침 위에 글을 새긴 비몸이 올려져 있고, 비몸 위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비머리가 얹혀 있다. 팔작지붕은 아래 절반은 네모꼴이고, 그 위 절반은 추녀가 없는 세모꼴로 지어진 지붕을 말한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뚜렷한데다 비각 안 저 멀리 들어앉아 있는 까닭에 신도비의 한문 내용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김수증이 전서(篆書)하고 글씨를 썼다'는 정철 신도비는 그것이 비각 안에 있지 않고 햇살을 받으며 눈앞에 있다 해도 웬만한 일반인은 읽어낼 수 없다. '전서'는 획이 아주 복잡하고 곡선이 많은 글씨체이기 때문이다.

 

비, 편액, 안내판 등의 내용과 글씨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야 한다.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주인공을 존경하고 대상을 아낄 것인가. 그런 뜻에서, 새로 세워지는 문화재의 안내판은 당연히 한글로 기록돼야 한다.    

 

안내판은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고 설명해준다. 그런데  '(정철이)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의 영광을 누렸다'에 나오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용어는 곰곰 생각해보아야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왕이 신하에게 휴가(暇)를 주어(賜) 책(書)을 읽도록(讀) 하는 제도가 바로 사가독서이다.

 

부인과 함께 누워 멀리 진천읍을 바라보고 있는 정철

 

정송강사 홍살문 옆에 서서 왼쪽을 응시하면 개울 위에 걸쳐진 작은 다리가 보이고, 그 너머로 산길이 굽이친다. 그 오솔길로 10분가량 오르면 송강 묘소에 닿는다. 명종 17년(1562년)에 장원급제해 뒷날 좌의정까지 역임한 정철은 지금 부인 문화류(柳)씨와 함께 합장된 채 진천읍 방향을 굽어보고 있다. 묘소 앞에는 묘비, 문인석 등이 반듯하게 놓여 있어 과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이자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다운 대접을 받고 있는 듯 느껴진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 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사라시랴

하늘 갓튼 가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 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平生(평생)애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이고 진 뎌 늘그니 짐 프러 나랄 주오

나난 졈엇꺼니 돌히라 므거올까

늘거도 설웨라커든 지믈 조차 지실까.

 

16수로 된 연시조 <훈민가(訓民歌)> 중 세 수가 온전히 생각난다. 이런 시조를 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은 것일까. 아들 종명(宗溟)은 사람들이 널리 칭찬한 효자였다. 묘소 안내판은 그를 두고 '단지(斷指)까지 한 효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쏟았다는 뜻이다.  

 

차남 종명의 묘도 송강 묘역에 함께 있다. 송강의 묘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무덤이 종명의 묘이다. 종명 역시 아버지처럼 과거에 장원급제를 한 인물이다.

 

골수에 사무친 내 병, 모두 님의 탓이로다

 

정철의 묘소를 찾았다면, 그의 시조 한 수나 가사 한 구절 정도는 읊고 내려오는 것이 예의일 터이다. 훈민가도 그렇지만,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세 편 모두가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려 있는 걸작들이므로, 우리 국민들 중 이곳에서 결례를 할 이는 거의 없겠다. 학창 시절을 회고하면서 정철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려보자.

 

하라도 열두 때, 한 달도 셜흔 날,

져근덧 생각 마라. 이 시람 닛쟈 하니

마암의 매쳐 이셔 骨髓(골슈)의 깨텨시니

扁鵲(편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여 범나비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데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라셔도 내 님 조차려 하노라

 

김유신 유적을 답사하던 중 뜻밖의 횡재를 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최고봉인 정철 선생의 사당과 묘소를 방문하게 됐으니 말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정말 복음(福音)인 모양이다. 이게 다 '역사유적 답사여행을 다닐 때에는 길가에세워져 있는 갈색 이정표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실천한 덕분이다. 

 

물론 선생이 나의 방문을 알 리는 없다. 그래도 나는 선생이 노래한 것처럼 '님이야 난 줄 모르셔도 나는 님을 따르려 하노라'를 실천했다. 다만 내가 향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겨 앉았는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아닌 듯해서,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철#사미인곡#훈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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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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