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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비가 흩뿌려 운전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영덕을 떠나 신자들과 좁은 승합차에 기대어 피곤함에 지친 길을 덜컹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둑한 하늘, 칙칙한 도심을 관통하는 길이지만 그러한 눅눅함을 달랠 위안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참 보람된 하루였다는 생각에 운전대를 잡고도 평안했습니다. 바로 이날이 안동교구 영해성당에서 '동해안 탈핵 천주교 연대' 출범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과를 마치고 밀양 사제관에 몸을 누이려는 찰나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저의 모든 오감을 사정없이 찌르듯 고통스럽게 귓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바로 이날 오후 8시에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 보라마을에서 이치우 어르신이 송전 철탑 공사장에 투입된 용역 깡패들과 맞서다 격분하여 분신하신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어떤 경로로 이 땅에 임하게 되는지. 하지만 이건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탈핵의 기치 아래 생명의 문화를 퍼뜨리고자 동해안 탈핵 천주교 연대가 탄생한 날, 밀양에서는 신고리 핵발전소로 인한 송전 철탑 때문에 이치우 어르신이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환경문제에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기껏해야 샴푸를 쓰지 않고, GMO에 경각심을 가지는 정도였죠. 그나마 많은 신부님의 노고에 숟가락 하나 얹듯 4대강이다, 강정마을이다 하며 결합하려 조금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그런 제가 밀양에 오고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송전탑 공사와 어르신들의 오갈 데 없는 고독한 싸움에 눈을 감고 발길을 돌리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르신들과 산을 함께 올라 인부들과 옥신각신하며 싸우고, 포크레인에 올라타 장비 투입을 막고, 움막 같은 천막을 짓고 그 속에서 밥을 해먹으며 생명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내 삶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소명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아갈 쯤에 이 송전 철탑의 원흉이 핵발전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송전탑 백지화와 탈핵의 길을 아울러 볼 수 있는 눈을 뼈아프게 얻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밤거리를 밝히기 위해 철탑을 꽂아야 하는 현실 

신고리핵발전소에서 출발하여 기장, 양산, 밀양, 창녕으로 이어지는 765,000v 송전탑은 그것이 관통하는 지역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의 대도시 전력 공급을 위한 원거리 전력수송망입니다.

도시 사람을 위해, 땀 흘려 돈도 안 되는 농사를 짓느라 하루해가 지는 시골 어르신들의 논밭과 마을 산등성이에 도시의 화려한 밤거리를 밝히기 위해 철탑을 꽂아야 하는 현실이 기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도 전원개발촉진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을 들이밀어 합법을 가장하여 겨우 10%대의 보상만으로 평생 일구어온 땅을 강탈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이 순박한 어르신들도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이 어르신들은 정부의 일에 감히 대항할 줄 모르는 참으로 보수적인 분들입니다.

더더구나 국책사업이라고 하는데 어찌 입이라도 뻥긋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주민공청회 한 번 없이, 아무도 모르게 측량을 하고, 멋대로 송전선로를 그어 놓고는 난데없이 공사하겠으니 그냥 땅을 내놓고 물러나라 하니 이 보수적인 분들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싸움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분들의 입에선 언젠가부터 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그 싸움은 엉뚱하게도 주민 사이를 갈라놓아 마을을 시끄럽게 만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7년을 내리 싸우며 지칠 대로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할 즈음에 이치우 어르신이 산화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고된 살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고된 살인'입니다. 어르신들을 피해 헬기를 동원하여 중장비 등을 나르고, 전기톱을 들고 위협적으로 생나무를 자르는 그들에 맞서던 어르신들 얼굴에 사진기를 들이밀어 공사방해 혐의를 씌워 고소․고발을 남발하여 130명이 재판에 계류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급기야 어르신들은 인부와 싸우며 뒹굴다가 다쳐 그 중장비를 나르던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르던 60~70대의 어르신이 그나마 내려갈 때는 헬기에 실려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폭력은 그 강도가 더해지면서 급기야는 산외면 희곡리에서 배경남 태고종 여스님의 성폭력 사건으로 발전했습니다.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음부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으로 이미 그 현장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경에 건장한 용역 깡패 50명을 투입하여 어르신들을 내팽개치는 상황에서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속에서 이치우 어르신은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안고 갈 결심을 하고 죽음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규 건설 중인 핵발전소 7개 중에서 5개를 수주받은 현대건설 출신의 김중겸 한전 사장, 핵발전소 건설을 통해 현대건설을 키워온 이명박 대통령의 타협 없는 핵발전 중흥계획은 그렇게 시골 촌구석 순박한 한 노인을 살해한 것입니다. 송전탑,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우리의 산천을 가로지르도록 허용된 것은 또한 더 안락한 생활을 위해 에너지 소비에 의존한 우리들의 암묵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묻어두고 얼버무리는 자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주인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해야 합니다. 동해안 탈핵 천주교 연대, 그것은 생명과 공존할 수 없는 죽음의 기술에 대한 교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감히 결성된 것입니다. 핵발전소와 핵무기, 이 괴물 쌍둥이의 위협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제안합니다. 후쿠시마 핵사고 1주기를 기억하는 행사가 3월 10일(토) 오후 1시에 서울 시청광장과 부산역 광장에서 동시에 개최됩니다. 3월 16일(금)~17(토) 밀양에서 벌목되어 벌거숭이가 된 송전탑 건설 예정지에 나무를 심는 희망버스 행사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3월 19일(월)~20일(화)에 삼척에서 핵 없는 사회를 위한 미사 및 탈핵 행사가 개최됩니다. 우리, 이 중에 최소한 한 곳은 방문해 봅시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것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그 순간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학살된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현장에서 부활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균형 있는 성장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시간이 세상의 모든 선한 사람을 위한 연대를 위해 봉헌되기를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김준한 님은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밀양 예림성당 주임신부입니다. 이 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핵, #밀양, #이치우, #천주교 탈핵연대, #핵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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