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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자서전>
 <책의 자서전>
ⓒ 열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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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자서전>(열대림 출판사 펴냄)은 책을 좋아하는 내겐 썩 의미 있는 책이다. 오래, 자주 들여다보게 될 것 같다. 내 생활의 가장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고, 또 가장  많은 것들을 얻는 책을,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평가하고 바라보았던 책을, 책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고 헤아려보게 한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즉 화자인 '나'는 이탈리아 소설로 1938년생 초판본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여성을 모르는 한 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인데, 지나치게 진보적이거나 참여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과 본질적인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라 파시즘기의 젊은이를 테마로 하는 영화 작업에 참고자료가 되기도 했다.

나를 쓴 작가는 시를 전혀 써본 적이 없는 남성 작가로 스스로 훼밍웨이나 존 스타인벡급 작품이라 자부하지만, 노벨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물론 나는 작가의 대표작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영화화 됐기에 화려한 쇼윈도에 데뷔하고 싶었고, 또 영화로 만들어지고도 싶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못했다. 이는 한으로 남고 있다.

이런 나는, '이 계절의 걸작 중의 걸작' 등과 같은 명성으로 지난날 한때 꽤나 많이 팔려 여러 판을 거듭 찍은 '베스트셀러'였던 나는 이제는 밀라노의 한 고서점에서 '나를 선택해 줄 누군가'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빨리 선택해줬음 좋겠다. 그래서 나를 폐기 위기에서 구해줬음 좋겠다.

아쉽게도 내가 훼밍웨이와 스타인벡 등의 책 등과 함께 눈에 잘 띄지 않는 선반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밀라노의 이 고서점은 7월 말에 문을 닫을 예정인데 그때까지 선택받지 못하면 나는 폐지로 전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내가 한 중년여성을 유혹하기까지 했겠는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가 눈을 들었다. 그의 손이 나를 집는다. 그는 생각 중이다. 그는 나를 제자리에 놓는 장난을 하지 않을 것이다. 책 더미에 올려놓는다. 됐다. 나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출 것 같다. 잘 있게. 훼밍웨이. 종종 자네 시를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 모두들 잘 있어. 상자 속에서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들도 안녕. 이 네 번째 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일단은 위기를 모면했다는 사실을 즐기도록 하자. 만에 하나 재활용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옳지 않아. 마침내, 정말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난 아직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 모뎀, 골뱅이(@), SMS의 시대라고 뭐가 다르겠어.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생각이 난 거야. 그렇지만 무례하고 그러고 싶지는 않다. 기회가 오면 말을 해도 되는지 물어 볼 것이다.  - <책의 자서전>에서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주인공은 폐점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이처럼 네번째 주인이 될, '내 취향이 아닌 어떤 남자'에게 수많은 책들과 함께 선택받음으로써 폐기의 위기를 일단 모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의 만 번째 장서가 되어 자신의 굴곡진 60년, 즉 세 명의 주인들과 고서점에서 무료하고 초조하게 보낸 1년을 회상한다. 

아직도 책이 줄 수 있는 게 많다... 정말?

이제까지 우리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그와는 정반대로 책이 이처럼 화자가 되어 또 다른 책들과 사람들의 책을 대하는 태도, 시대 변화에 따른 사람들의 책 읽는 성향이나 변화, 출판시장의 변화나 흐름 등을 이야기한다. 책 스스로 자신의 취향이나 맘에 드는 독자를 선택하기도 하고.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썩 독특하며 신선하다.

주인공인 책이 태어난 1938년 무렵부터 저자가 이 책을 쓴 2003년 무렵까지의 세계적 문학작품들과 라디오나 TV와 같은 신문물 도입 때마다 변화하는 사람들, 당시의 출판 동향과 흐름 등 책과 맞물리는 시대를 읽을 수 있음도 이 책의 장점. 효율적인 각주(본문의 부분이나 단어를 설명하고자 페이지 아래쪽에 따로 달아 놓은 풀이)도 이 책의 장점이다.

여하간 네 번째 주인을 만남으로써 폐기를 면하게 된 책은 말한다. "난 아직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 모뎀, 골뱅이(@), SMS의 시대라고 뭐가 다르겠어"라고. 하지만 글쎄? 자신을 선택해준 남자의 만 권째 장서가 되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주인공은 인터넷 넘어 스마트폰으로 책을 보는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까?

그 누구보다 책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있는 듯한, 책이 자신의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첫인상을 말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주인공을 선택함으로써 폐기위기에서 구해주는, 주인공을 만 권째 장서로 만드는 저자는 실제 1만2000권의 장서가이자 애서가이며 독서가이다.

어느 날 베니스 출신 정신 분석학자인 체자레 무자티의 죽음으로 운 좋게 그의 장서 2000권을 100만 리라(2002년도쯤의 환율로 환산해보니 58만 원 정도?)라는 헐값에 사게 되면서 1만2000여 권의 장서가가 되었는데,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책들의 비참한 말로에 분개하면서라고.

'세상맛' 못 본 책들... 날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책(신간)의 수명이 요구르트의 유통기한과 같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책들이 나오고 많은 책들이 묻힌다. 그런데 2004년에 첫 출판된 <책의 자서전>을 지금도 구입할 수 있음이 놀랍다. 대부분 몇 년 지나면 절판되어 구할 수 없던데. 내가 읽은 것은 2006년 3쇄본이다. 그에 대해 이 책을 출판한 열대림 출판사의 담당자는 8일에 한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출판 당시 언론들의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많이 팔린 것도 사실이지만, 주목만큼 엄청나게 많이 팔린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 중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란 이야길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인지 아직도 꾸준하게 팔리고 있다.

책이 책과 독자를 말하고 있는 책이라, 책의 입장을 헤아려보게 하는 책이라, 우리 곁에 책이 있는 한 오래 함께 할 수 있는 책이길 바라고 있다. 출판담당자이지만 그에 앞서 책을, 이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지난 가을에 만났다. 참 많은 책들을 읽어왔는데 그럼에도 읽지 못한 책들이 더 많다는 걸, 이 엄연한 사실을 실감할 때는 <책의 자서전>처럼 나는 이제야 읽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다. 게다가 절판이라면 그야말로 아쉬울 것. 입소문 때문인지 2004년에 첫 출판된 이 책은 다행스럽게 쉽게 구할 수 있다.

'나는 어떤 독자인가? (나는 썩 괜찮은 독자라고 생각하지만) 내 책들은 어떤 말을 할까? 더 읽지 않고 던져두고 만 책들은, 읽겠다고 가져다 두고 읽지 않아 세상맛을 거의 보지 못한 책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그래서 날 많이 원망하고 있진 않을까?'

<책의 자서전>을 읽으며 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자, 읽고 난 후 책장의 다른 책들 사이에 던져두고 어지간해서는 돌아보기 쉽지 않아 아마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수많은 내 책들을 돌아보며, 미안해하며 물었던 질문이다.

올해는 책 읽는 국민들이 많기를 바라며 정부(문화관광부)가 정한 '책의 해'이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책은 어떻게 대해야 하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책은 어떤 독자를 원할까? 책이 책 스스로를 말하고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의 자서전>은 말해주리라.

덧붙이는 글 | <책의 자서전>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씀, 이현경 옮김, 열대림 펴냄, 2004년, 9000원



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열대림(2004)


태그:#책의 해, #독서의 해, #장서가, #독서가, #열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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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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