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집 앞에 나란히 앉으신 허병섭·이정진 선생님 부부
 집 앞에 나란히 앉으신 허병섭·이정진 선생님 부부
ⓒ 허병섭 이정진 선생 쾌유를 위한 카페

관련사진보기


오래 입원해 계시다가 우리 곁을 떠나셨네요. 27일 새벽 4시 반. 허병섭 목사님. 다시 일어나 우리 곁에서 함께해 주실것을 바랐건만 끝내 영안실로 가셔서 우리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고 계십니다.

[관련기사] 허병섭 선생 부부, 1주일 간격으로 의식 잃고 입원

아픈 가슴으로 떠올립니다. 안타까움으로. 아쉬움으로. 죄스러움으로. 허.병.섭 목사님. 어떤 말로도 다 담겨지지 않는 이름입니다. 당신이 살아오신 역정을 마지막 3년 동안 압축해서 다시 보여주셨는지요. 강남 성모병원에서 갑자기 쓰러지신 지 3년 하고도 3개월. 아내 이정진 선생님을 간병하시다가 쓰러지셔서 끝내 의식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 가십니다.

내 나이 20대 중반에 서로 허름한 작업복으로 만나 여기까지 어언 30년. 이곳 무주에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살면서 푸른꿈고등학교, 녹색대, 생명평화결사 등 자주 만나고 얘기 나누고 하는 것이 다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는데. 병상에 누워 계셔도 마음속에는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살아 계셨는데 이제 그마저 놓으시고 떠나가시네요.

개신교 역사상 유일하게 목사증을 반납하신 분. 노동자들, 노가다꾼들과 데모하다 경찰서로 끌려 들어가 다들 개차반으로 얻어 터지고 짓밟히는데 유독 당신만 점잖게 대접 받는 게 '목사'라는 직함 때문임을 뼈저리게 확인하고는 바로 목사증을 반납해 버리신 분.

지난 달 구리에 있는 녹색병원에 찾아 갔을 때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더니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결코 영안실로 부랴부랴 찾아가며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매월 찾아 뵈리, 날을 잡아 공동으로 병문가리, 기도회라도 하면서 우리 삶의 쾌유를 빌리 했는데 모두 헛되게 허공에 날렸네요.

목사님이 쓰러지가 얼마 전이었지요. 아마 2008년 가을이었을 겁니다. 무주에서 만나 서울행 버스를 같이 타고 가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주로 큐(Q)자료, 도마복음, 사해문서, 외경 등이었습니다. 얘기 끝에 제가 "성경을 어디까지 믿어야 됩니까? 어느게 사실이고 어느게 설화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씩 웃으시면서 "문학작품"이라고 하셨지요. 내 인생마저도 하나의 작품일 뿐이라고 저는 새겼습니다. 예수의 삶 마저도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마다의 작품으로 재탄생된다는 가르침으로 새겼습니다.

장례일정
3월 27일
오후 4:30 소천.
오후 10:20 추도예배

3월 28일
오후 2:00 입관예배.

3월 29일
오전 9:00 민주사회장 영결식.
10:00 발인.
오후 2:00 벽제화장터 후 마석 모란공원묘지 납골묘에 안치.

빈민의 벗이라고도 불리고, 청계천의 공목사로도 불리는 허병섭 목사님. 목사님의 수 많은 일화들이 인터넷에 꽉 차 있지만 내게 남은 허병섭 목사님은 아주 생생한 생활인입니다. 무주 안성면 진도리의 집을 지으실 때 같이 거들고 그때 남은 벽돌을 가져와서 제 집을 지었지요.

푸른꿈고등학교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하시던 말씀. 이 집과 땅마저 전부 다 국민신탁에 다 기증해 버리셨다는 말씀. '전북생명평화설레임' 학교를 진행하면서 진행자의 지시를 꼬박꼬박 초등학생처럼 따르던 모습.

한 없이 낮아지시고 한 없이 비우내시던 모습으로 되살아나십니다. 허병섭 목사님. 어떤 권위도 지위도 부도 사양 하신 분. 영원한 선생님. 머리 숙입니다. 선생님의 영전 앞에.


태그:#허병섭, #이정진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