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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길, 낡은 주택가 좁은 골목을 올라 꼭대기에 이르니 오래 전부터 쓰지 않아 부서지고 망가졌지만 그 위용만은 여전한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녹슨 철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아니었더라면 잘못 찾아온 줄 알았을 것이다. 건물을 돌아서니 비록 폐공간이지만 마을극장의 멋이 물씬 풍겨난다.

폐건물 정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
▲ 공연 포스터 폐건물 정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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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건물을 마을극장으로 만들다
▲ 우각로 마을극장 폐건물을 마을극장으로 만들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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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극단을 만들어 자신이 살아온 기억과 마을의 역사를 연극으로 꾸며 벌써 몇 년 째 공연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진작 들었지만 벼르고 별러 이제서야 나선 길이었다. 극단의 정식 이름은 '문화봉사단 실버극단 학산'이다. 무료 초청 공연을 하는 '문화봉사단'이며, 65세 이상이 모인 '실버극단'이고, 인천시 남구 학산문화원 소속이어서 '학산'이다.

마지막 리허설을 하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감돈다. 여러 곳에 공연을 다니면서도 늘 긴장되실 거라 짐작하며 자리를 잡고 앉는다. 기둥 사이로 현수막이 걸려 있는 쪽이 무대, 플라스틱 의자와 목욕탕 깔판이 깔려 있는 쪽이 객석이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날은 언제였는지 모두가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 가운데 다섯 가지를 골라 살을 붙여 극으로 꾸몄다. 순이와 용팔이의 첫사랑에서부터 동생을 등에 업고 학교에 가 친구들의 어깨 너머로 공부하던 기억, 학생 출입 금지였던 극장을 몰래 드나들던 추억, 조실부모하고 고모댁에 얹혀 살던 시절에 극적으로 결혼을 하게 된 사연, TV와 전화기가 있는 옆집에 너나 할 것 없이 신세를 지던 시절의 에피소드까지.

극장 출입을 하다 걸린 여학생들...
▲ 연극 <아름다운 날들>의 한 장면 극장 출입을 하다 걸린 여학생들...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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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를 달래는 젊은 부부로 분한 할머니들
▲ 연극 <아름다운 날들>의 한 장면 쌍둥이를 달래는 젊은 부부로 분한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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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는 재미를 더해 준 것은 객석에 앉은 어르신들의 반응이었다. 배우들의 행동에 일일이 설명을 하고 해석을 붙이는가 하면, 맞장구에다가 추임새에, 금세 웃고 금세 혀를 차신다. 생각지 못한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반응이 놀랍고 재미있었다.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동생을 돌봐야 했던 아이는 포대기로 동생을 등에 업고 학교에 가 친구들 어깨 너머로 공부를 한다. 딱하게 여긴 선생님이 교실로 불러들이지만 아기가 울고 기저귀를 가느라 북새통이다.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되고 이제 늙어 노인이 된 할머니는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날'로 이 때를 꼽았다.

전쟁과 가난, 그래도 서로 등 기대고 살던 시절,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기에 서로의 사정을 빤히 알아 못 본 척 눈감아주고 모르는 체하며 손 내밀었던 시절이라서 였을 것이다. 힘들고 외로워도 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던 시절이기에 가장 아름다운 날로 꼽으셨겠지.

공연을 마친 후 다같이 무대 인사
▲ 연극 <아름다운 날들> 공연을 마친 후 다같이 무대 인사
ⓒ 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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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주인공 순이 역할을 한 윤순자 어르신(78세)은 극단 활동을 통해 "내가 연극을 하고 이렇게 무대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이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라며, 다른 어르신들께 당부했다.

"나이 많다고 망설이지 말고 오세요. 같이 이야기하고 의논하면서 하나 하나 배우면 되니까 어렵지 않아요."

강사이면서 연출을 맡은 신운섭씨와 이란희씨에게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물었다. 두 사람 모두 40대 초반인데 각기 이런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이 다음에 나이 들어서 뭐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늘 하게 됐다,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말로 할 수 없는 가르침을 얻는다."
"노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넉넉한 지혜와 열정을 가진, 철이 든 어른이 되고 싶다."

50분의 짧은 공연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일일이 다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그 무엇이었다. 정말 나는 어르신들만큼의 나이가 됐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어르신들, 어르신들은 지금 가장 아름다운 날을 보내고 계신 겁니다. 정말 아름답고 멋지세요!"

객석의 모습
▲ 연극 <아름다운 날들> 객석의 모습
ⓒ 신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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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실버문화봉사단 '학산' 창작 연극 <아름다운 날들> 초청 공연 문의 및 극단 수강생 참여 신청: 인천시 남구 학산문화원 032-866-3994



태그:#아름다운 날들, #실버문화봉사단, #학산, #할머니 연극, #노인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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