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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표 끊어 두었으니 어쩔 수 없이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3시, 알람이 울렸을 때 나는 내가 왜 이 여행길에 나서야만 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혼자 떠나는 일본 여행, 불쑥 이루어진 일이다. 자칭 후천성 여행 중독자로서 혼자 떠나는 여행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이번 여행은 유달리 갑작스럽고 엉뚱하게 결정되었다. 시어머님과 9살 난 아이에게는 얼마 전 대수술을 한 엄마를 간호하러 서울로 올라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편과는 이래저래 짬짜미를 한 끝에 벼락같이 성사된 여행이다.

엄마는 뇌종양 제거 수술 이후 한동안 당신의 아파트 비밀번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남편과 같이 자영업을 하는 나로서는 엄마의 수술 당시에도 자주 못 갈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런데도 왜 지금 일본으로의 여행을 감행해야 하는 것인지. 아마도 엄마의 심각한 상태를 접하고 나서 내 마음속에 은밀히 묵혀두었던 어떤 감정을 처리해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심 속에는 언젠가 아버지가 한 이 말이 마음속에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너 다음에 여행 가게 되면 꼭 닛코를 가봐라. 닛코를 보지 않고서는 일본을 봤다고 할 수 없지."

부모의 과거사, 특히 아버지의 과거사는 언젠가부터 나에게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왜 가족의 과거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결혼 후, 특히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소위 말하는 '나를 찾는 길'에 이전보다 더 몰두하게 되었다. 나의 인생을 아이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만큼이나, 부모의 삶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었다. 시어머님을 모시면서는 친정 부모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나와는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관계였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고단한 출발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센소지 앞 전문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센소지 앞 전문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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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제 거기 갔다 왔다."

새벽길을 달려 도착한 공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을 때, 제일 먼저 듣게 된 엄마의 한 마디다. 아, 또 시작인가 싶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그렇게 아버지 기일을 까맣게 잊고 전화 한 통 없을 수가 있냐. 올케들 보기 민망하고 창피하더라. 우리끼리 벽제 갔다는 왔다만. 너 그러는 게 아니야. 어릴 적에는 어리니까 그렇다 하고. 지금은 40이 넘어서도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내가 참 서글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다 나더라. 니 아버지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무심하길 그리 무심하냐?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릴 만도 하다마는."

'기일은 잊지 않았지만 굳이 가고 싶진 않았어요'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나도 잘 모르는 이 복잡한 심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다잡으며 "잘 다녀왔으면 됐지 뭐, 그럼 끊어" 하고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늘 이렇다. 사랑이니 부녀의 정이니 하는 말들이 너무나 어색한 나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쉽게 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내가 아버지에게 엄청난 부채의식을 느낀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짐을 내려놓고 싶어 인천공항까지 왔으면서도, 나는 끝내 엄마에게는 일본에 간다는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기분 탓이었을까, 때마침 내 옆을 지나가는 화사한 옷차림의 아가씨, 아줌마들도 눈에 거슬린다. 낡은 트레킹화와 큰 맘 먹고 산 배낭이 싫어졌다. 그 가방을 사는 데도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저가 항공사를 예약했고 도쿄에서도 가장 싼 민박집을 구했다. 모든 게 싸구려다. 40대 중반의 나는 이제 이런 삶이 계속될까봐 여간 짜증나고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번 여행은 출발부터 궁상스럽고 호졸곤한 나의 현실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공항의 맨 구석자리에 위치한 저가 항공사의 플랫폼으로 향한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화장을 고쳐볼까 했는데 오늘따라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며 탄력을 잃은 얼굴살이 몹시 꺼림직했다. 턱에 숨이 차도록 일하고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한 탓일 게다. 살면 살수록 일상은 피곤해지고, 나는 점점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가슴 가득히 밀려온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기내식이 제공되지 않는 저가 항공사라 여기저기서 컵라면을 홀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고 온 아이의 일이며 밀려있는 온갖 일상들이 머리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몇 달씩 배낭여행도 다니곤 했지만 결혼 후에는 2박 3일도 이토록 벅차다. 잠이 올 듯 했지만 곧 깨어났다. 일본의 푸른 바다가 창 밖으로 가득히 펼쳐진다.

늘 일본을 그리워하던 아버지

아사쿠사 앞 불상
 아사쿠사 앞 불상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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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신 중심지라는 신오쿠보역에 도착했다. 나리타 공항에서 한 시간 반쯤 왔을까. 지하철을 타는 내내 서서 오고 배낭은 무겁고 돈을 아끼느라 간단한 점심만 먹었더니 도착하자마자 지쳐버렸다. 내 방은 도미토리인데, 아직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다다미방 안에서 나는 피곤과 고독감에 어처구니없이 서러워지기까지 했다.
방에 있으면 울음보라도 터질 것 같아서 결국 신오쿠보 역으로 나섰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즐비하고 한류스타 장근석 및 여러 한국 연예인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일단 밖으로 나오니 뭔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부터 나를 괴롭히던 찌질한 짠순이의 그림자를 벗어 버리고 싶어 통유리가 근사한 카페로 향했다.

한국 같으면 두 끼 식사비로 충분한 돈을 케이크 하나와 커피 값으로 지불하고 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고, 그 기세를 몰아 골목길에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집에서는 쉬쉬하며 베란다 한 구석에 숨어 피던 담배이건만, 여기서 보란 듯이 연기를 뿜어 올리니 한 순간에 잔다르크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전 심사숙고하여 가지고 온 소설 <대망>을 끄집어냈다. 지난 달 큰 맘 먹고 주문한 무려 32권짜리 일본 대하소설이다.

"너 일본이 얼마나 선진국인지 아나? 일본 같은 나라가 세상에 없다. 내 처음 일본에서 나와서 청도에 왔을 때 정말 얼매나 놀랬는지 원, 전기가 들어오나 전화가 되나. 그 깡촌에서 대식구 먹여 살리느라고. 니 할아버지는 무위도식하지, 장남이라고 다들 내만 쳐다보고 않았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버지는 일본 태생이다. 아마 오사카에서 출생했다고 한 것 같다. 아버지는 늘 일본을 그리워했고 우리나라를 꼭 '조선'이라고 불렀다. 조선옷, 조선음식…. 그러고 보니 할머니도 '니, 시, 로코' 하며 일본말로 숫자를 세었지.

삼촌과 고모들까지 모두 일본 태생이고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일본 생활이 어땠는지 세세하게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 몰래, 식구들 몰래 일본에 몇 번이나 다녀오곤 했다. 다녀오고 나서는 꼭 삼촌을 찾았어야 했는데 못 찾았다며 한탄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한 마디 하곤 했다.

"또 그 삼촌 타령! 조총련 간 사람을 뭐하러 찾아요? 어디 북송선이라도 탔으면 누구한테 불똥 튀라고! 원 니 아버지는 생각도 없이 참!"

엄마야 핀잔을 하든 말든, 천성이 낙천적이던 아버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술 한 잔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옌카나 심지어 기미가요까지 불렀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단결심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조선'은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아마도 내가 아버지에게 정서적 거리감을 느끼게 된 것은 이런 아버지의 일본 사랑이 그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 일본을 이토록 사랑한 사람은 아버지 외에 몇몇 철없는 중고등학생들뿐이었다. 일본이라 하면 국권침탈, 위안부 할머니 등과 연관되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언젠가는 바다에 가라앉기를 소망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보편적 정서이거늘, 어쩌자고 일본 사랑을 저리도 거침없이 내비치는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이 책, 내가 지금 아버지의 실제 고향인 일본에서 손에 들고 있는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쿠가와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이 책은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일본 책들도 많았지만, 이 책만큼 아버지가 애지중지 한 책은 없었다.

도쿄, 잃어버린 꿈을 꾸다

일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붉은 옷을 걸친 불상
 일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붉은 옷을 걸친 불상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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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오면 가보고 싶은 박물관이 하나 있었다. 조선미술과 공예품에 빠져 살았다는 일본의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박물관이다. 대학 시절 예술사 강사가 유홍준 선생이었다. 그 강의에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깔끔한 정원에 둘러싸인, 부촌의 가운데 자리잡은 고즈넉한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는 문을 닫기 한 시간 전이었다. 나무로 지어진 정갈한 내부가 마음을 사로잡는, 한국 민예품 수집 박물관이었다. 대단한 컬렉션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일상의 물건들이 꽤나 감칠맛 나게 느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냐는 매표원 아가씨의 칭찬 비슷한 말에 다소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조용한 골목길을 걸으며 캔 커피를 마시니 오히려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내가 전공한 신화학은 민속학과 관련이 깊다. 한창 공부할 때는 일본, 중국을 연결하는 신화연구 및 신화적 이야기를 모아 글을 써보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었으나, 박인로의 말처럼 "입과 배가 누가 되어, 아아, 잊어버렸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에는 후회하지 않고 하고자 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품었던 희망이 이제는 낡고 낡은 꿈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삶에 대한 욕망은 늘 새로운 것이었다.

우에노 역에서 내렸다. 한참을 걸어 우리의 종로통과 비슷한 센소지 근방까지 왔다. 여기가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 그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장소인 센소지다. 센소지 앞의 작은 기념품 가게들을 둘러보고, 청동 불상이 모셔진 공원 한 가운데에서 캔 맥주를 홀짝거렸다. 피곤한 몸에 맥주가 들어가니 어지러운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내일 닛코를 갈 수 있을지,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거기 뭐 대단한 게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꼭 가야만 할까.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의지해서 왕복 다섯 시간을 소요하느니 여기 도쿄에서 국립박물관이나 가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 게다가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다. 게다가 아사쿠사 기차역은 지하철 역과는 좀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하루에 기차가 몇 대 없기 때문에 시간을 잘 맞추어 타야만 한다는 가이북의 안내가 더더욱 나를 자신없게 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태그:#일본여행, #도쿄, #신오쿠보, #민예박물관, #아사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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