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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지뢰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나서 툭 튀어나온 질문은, '그래서 대안은?'이었다. 대안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이것은 일종의 지뢰다. 대인지뢰가 아니라 '대안 지뢰'. 한번 밟으면 헤어나올 수 없다. 영국 대처 수상이 파놓은 대안지뢰가 가장 파괴력이 있었다.

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 (대처 수상)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칠 당시 대처 수상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부치면서 반대파들에게 '이 방법 외에 대안을 내놔 봐라'고 요구했고, 대안이 없다면 잔말 말고 따라오라고 일축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이 프레임에 빠지면 경우의 수는 세 가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시장을 없애든가(반자본주의), 모든 것을 시장대로 하든가(신자유주의), 적당히 시장대로 하든가(제3의 길)"가 그것이다.

2013년의 시대정신이나 다음 정권의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앞서 '대안'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게 [안철수의 생각]의 문맥 안에 담긴 메시지다. 가수 장기하의 '아무거도 없잖아'라는 노랫말에는 대안의 함정에 빠진 우리의 현대사를 풍자하고 있다.

광채가 나는 눈을 가진
선지자의 입술 사이로
그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다운 음성이
머리를 조아린 다음
거친 가시밭길을 지나 꼬박 석 달을 왔지마는
아무 것도 없잖어
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풀은 한 포기도 없잖어
이거 뭐 완전히 속았잖어
소들은 굶어 죽게 생겼잖어
딱딱한 자갈밖에는 없잖어
먹을 거는 한 개도 없잖어
이건 뭐 뭐가 없잖어
되돌아갈 수도 없잖어
- 장기하 1집, [아무것도 없잖아] 가사 일부

신 지식인, 동북아 금융 허브, 747, 뉴타운 공약 등 많은 공약과 대안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나온 대안이 적지는 않은데 우리의 삶은 편안해졌을까? 지금 논의되고 있는 대안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이다, 그리고 증세다. 이것은 비전이라고도 불리고 공약이라고도 불리고 대안이라고도 불리는데, 한마디로 '꿈'이다. 현실을 향해 나아가는 꿈이지만,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꿈이 현실로 되는 것을 얼마나 경험해 보았나? 이쯤 되면 '대안 자체'에 대해서 의문의 화살을 던져봐야 한다.


대안에 대해서 대처 수상과는 전혀 다른 아이디어를 실행했던 스웨덴의 정치인 비그포르스(1881~1977)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 전세계를 덮쳤을 때 자본주의로 치면 변방에 불과했던 스웨덴은 복지 국가 모델을 실현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황금시대로 이어진 경제·사회적 기획과 정치연합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데 이 시기를 주도한 사상이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이다.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의 저자이기도 한 홍 소장은 비그포르스는 청사진 따위를 제시하지 않은 게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뭔가 신묘한 계획과 신묘한 플랜이 있을 거라는 환상부터 깨라!"는 것이다. 1930년대 당시 많은 대안이 쏟아졌다. 국가사회주의(파시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등.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전형적인 하향식이다. 엘리트들이 대안을 제시하고 대중들이 따라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대부분 실패했다. 스웨덴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1930년대 불황 속의 스웨덴에서 노동자·서민의 열망은 혁명도 아니고 시장주의도 아니었다. 일자리와 사회보장이었다. 시민의 열망을 모아 정책으로 실천하고 그 결과를 성찰해서 목표를 수정하며 '잠정적 유토피아'를 실현"(시사IN217호, "복지국가가 궁금해? 비그포르스를 봐!")해 왔다. 비그포르스의 사회민주당이 이 정책으로 집권을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헌 이후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대중이 원하는 것에서 출발한 경우가 없었다. '대중이 원할 것 같은 것'이 전부다. 장님 문고리 잡는 격으로 얻어걸린 적은 있었지만, 2013년은 요행에 운명을 맡기기에는 너무 위급하다.

"[안철수의 생각]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가 포인트다!

안철수 원장의 생각은 지식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이고 시시하기까지 하다. 지식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서로 단련된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다가오고 한나절 정도면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언론인, 지식인, 입장과 이해득실을 가지고 접근하는 정치인, 뭔가 말을 섞으려는 교수 등은 안철수의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냥 일반 국민이 보는 것보다 못하다. 안철수 원장의 높은 지지율이 왜 이렇게 유지되는지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안철수의 생각]에 담겨 있는 시대정신은 '시대정신 없음'이다. 시대정신이 없는 것이 안철수가 생각하는 시대정신이다. 역설적인 결론이 되어 버렸지만 어쩔 수 없다. 예컨대 경제학자 홍기빈 소장 역시 경제 현상을 깊이 분석한 결과 돈벌이 경제에 대비되는 '살림살이 경제'를 결론으로 삼으며 멋적어 했다. 그는 한 강연에서 "이걸 꼭 말로 해야 아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냥 알던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는 이렇게 멋적고 시시한 시대가 아닐까? 하지만 시시한 말이 무섭다.

차기 정부에서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분노와 갈망이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 유럽 경제 위기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경제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욕구와 주장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출될 수 이을 거예요. ([안철수의 생각], 42면(이후부터는 면 수만 표기)

이런 의견은 안철수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시점이다. 의정부, 여의도, 수원 등지에서 '묻지마 범죄' 같은 '좌절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 원장의 예견보다 훨씬 상황이 다급한 셈이다. 요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증세' 이슈와 관련해서도 안 원장의 말의 힘은 독보적이다. 예컨대 민주통합당의 정세균 후보는  "중산층이 공백상태인 지금은 보편적 증세보다는 부자증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안 원장의 증세론을 비판했지만 1% 증세는 이상론에 가깝다. 당장 다음과 같은 반론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까?

선별적 복지만 고수한다면 부유층과 중산층의 '反 복지 동맹'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요. 세금 내는 사람 따로, 혜택 보는 사람 따로이니, 사회적으로 증세와 복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선별적 복지는 또 '낙인 효과'를 만들어 사회 통합에 금이 가게 하죠. 국민을 '시혜자'와 '수혜자'로 구분하니까요. (95~96면)


[안철수의 생각]은 잘 정리된 2012년 정치 리포트다. 모든 정치적 문제를 담으려다 보니 어떤 문제(가령 FTA 문제)는 건들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핵심 주제에 있어서는 완전무결하고 보편타당하게 생각을 담고 있어서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가령 복지, 증세의 문제는 쉽게 비판하기 어렵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실패자들에 대한 재기회 시스템, 중소기업 문제는 경험을 담아내고 있어서 대중에게 강력한 설득력을 준다. 가령 물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는 행복도 정의도 사라진다는 생각을 밑받침하는 '굶어죽은 할머니' 이야기는 준법과 정의, 도덕을 외쳐 왔던 현정부의 모순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버린다.

처음에는 아버지, 엄마와 함께 네 가족이 살았는데 아버지가 아프니까 엄마가 집을 나갔고, 아버지도 병으로 죽어 할머니와 손녀만 남았어요. 그러다 할머니가 몸져누우니 초등학생 손녀가 신문 배달을 해서 먹여 살렸는데 중학생이 된 후 결국 못 견디고 가출했어요. 할머니는 굶어서 숨진 채 발견됐고요. (60면)

그리고 의료봉사를 나갔을 때 주민들의 병이 낫지 않는 원인을 찾다가 아이들이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나서 약값을 100원씩 받았더니 치료율이 쑥 높아진 경험은 깊은 성찰과 감동을 주기까지 한다. [안철수의 생각]을 읽은 독자들은 과연 누구의 증세와 복지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까?

안철수 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비롯해 다른 후보들과 차별되는 점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 안 원장의 인생 행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고, 안 원장이 밑바닥부터 사회 곳곳을 직접 살피면서 고통을 공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한 가지 더 꼽자면 '질문'이다. 안 원장이 본격적으로 정치를 한다면 나는 '질문 정치'라는 것을 할 것 같다. 애초의 질문을 바꾸면서 현상과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 가는 방식이다. 안철수는 질문을 던지는 힘이 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바뀐 상황에 맞게 질문을 조정할 능력도 있다.

사실 제가 속한 세대는 전형적인문제풀이 위주의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어릴 적의 경험 덕분에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훈련이 가능했어요. 어릴 적에 공부를 못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기대도 적어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는데,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독서가 이공계에서도 인문학적 감성을 유지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어요. 그걸 바탕으로 이공계 공부를 하다 보니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졌던 것 같아요. 한 분야만 공부하고 성적이 좋았더라면 던지지 못할 질문들을 다른 분야의 기본을 갖추니 하게 된 것이지요. (195면)

요컨대 2012 대통령 선거를 안 원장 방식처럼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대선을 3~4개월 앞둔 시점에서 질문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1. 안철수가 출마할까, 하지 않을까?
2.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까,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까?
3. 대통령이 누가 될까?


1번 질문이 끝나야 2번 질문으로 갈 수 있다. 적어도 지금 박근혜 후보는 상수가 아니라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안 원장의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예견에 불과하다. 오히려 안 원장의 고민이 몇 % 정도 이루어졌는지, 지금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가 어떤 부분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여야 가릴 것 없이 대권주자들이 안 원장을 너무 안일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안철수의 생각]을 사심 없이 읽어 보면 문맥이 보일 텐데.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나중 문제다. 문제는 과연 2012 대통령 선거가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안철수의 생각 -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김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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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철수, #안철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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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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