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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 너무 적다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사면 되요. 집값이 올라가면 그 집을 담보로 또 다른 대출을 받을 수 있답니다." 

2008년 세계경제를 패닉상태에 빠트렸던 미국 발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그렇게 시작됐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미 연준의 금융 완화정책에 따른 유동성 과잉과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이루어진 금융기관의 방만한 대출 그리고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부동산 불패신화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주택경기의 과열을 우려한 연준이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자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가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주택 거품이 파열되자 주택대출시장은 물론 서브프라임 대출을 근거로 발행한 유동화 증권가격이 폭락했고 이 증권을 사들인 전 세계의 투자자들이 연쇄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다.

금융기관의 부실을 방치하면 경제의 혈관인 금융 기능이 마비되고, 금융 위기는 곧 실물경제 불황으로 이어질 것이므로 정부의 구제 조치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문제는 부실을 초래한 탐욕적인 금융기관을 응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려줌으로써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입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전체 부의 절반 이상을 가진 1%에 저항하여 99%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월가 점령시위가 발생한 직접적 이유이기도 하다.

금융위기 당시 미 행정부는 망가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부실자산 구제프로그램(TARP)을 통해 무려 7천억 달러가 넘는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다. 그렇다면 미 정부는 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을까? 다름 아닌 국채를 발행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가계로부터 세금을 걷는 것도, 이미 아사 상태에 돌입한 금융회사들에게 국채를 매입하라고 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이란 외국자본에 손을 내미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미국 채권을 사주었을까? 바로 중국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막 취임한 오바마 행정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클린턴 장관 등 주요 행정부 각료들을 중국으로 보내 금융위기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며 채권 세일즈를 한 것이었다. 수출도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를 쥐고 있던 중국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위기탈출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거래는 중국이 거대한 외환 보유고를 통해 미국의 국채를 사들여 재정적자를 막아주는 대신 미국은 중국에게 막대한 소비시장을 제공해주는 상호이익이 부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구도다.

4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재정절벽(fiscal cliff)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연간 국가부채가 법정 한도를 넘어 만일 기준을 높이지 않을 경우 내년에만 1천억 달러 규모의 연방정부 예산이 자동 삭감되고 미국 국민들은 연간 5천억 달러가 넘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재정절벽으로 인해 예산 삭감과 세금 인상이 현실화될 경우, 2014년까지 600만 개가 넘는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은 매년 1조 달러 이상의 재정적자를 보고 있으며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매달 1천억 달러의 국채를 발행하고 있지만 답장 급한 불을 끄려면 특별한 대안이 없는 상태다.

협상 마감 시한을 불과 3일 앞둔 시점에 행정부와 의회 간 부분 타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 협상이 타결되어 부채한도 기준선을 높인다 하더라도 이는 현재 미국 정부가 짊어지고 있는 '빚 주머니의 용량을 좀 더 키운' 임시방편일 뿐, 이미 오랫동안 구조화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재정절벽 사태는 채권을 발행하든 돈을 빌리든 결국 빚으로 빚을 갚는 돌려막기일 뿐,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내년 1.1일부터 현실화되는 절벽 아래로의 추락을 막기 위한 행정부와 의회 간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부자증세' 문제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정절벽을 피하기 위한 어떤 아이디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만 부자증세 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부시 행정부가 부자들에게 주었던 감세혜택만 종료해도 재정절벽의 절반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논리다. 최근의 설문조사는 '상위소득자를 포함하여' 미국인의 약 80%가 부자증세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11월. 오바마 대통령은 다수당인 공화당과의 협상에서 전임 부시 대통령이 승인한 부자감세를 2년 더 연장해주는 법안을 승인했다. '오바마-부시 법안'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소득 25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에게까지 세금 감면을 확대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조치로 인해 미국의 부자들은 수천억 달러의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부시 집권기를 포함하여 지난 10년 동안 행해진 부자들에 대한 감세 조치는 어떤 경제적 효과를 낳았을까?

미 의회조사국(CRS)은 13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부자감세는 저축, 투자, 생산성 증가와 관계가 없고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며, 반면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감세를 하면 성장의 과실이 저소득·중산층까지 흐를 것이라는 이른바 '낙수효과'가 허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 셈이다.

대선 공약 집행을 위한 5조 원의 재원조달을 위한 방안으로 국채 발행이 논의되고 있다. 당초 2∼3조 원대 규모로 검토된 발행 규모가 9천억 원 수준에서 여-야 간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금액을 낮추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부가하고 국민에게 부담이 가는 국채발행 규모는 줄임으로써 '부자증세냐 국채발행이냐'라는 각자의 해법에서 한발씩 물러선 셈이다. 우리는 이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11년을 기준으로 정부채무는 공공기관 부채를 포함해 470조 원 남짓 된다. 내년 정부예산(350조) 대비 1.3배에 달하며 작년 국내총생산(1237조)의 38% 수준이다. 10년 전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어났다. 400조 원에 달하는 공기업 부채, 10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 부채 등을 모두 합할 경우 이미 2000조 원이 넘는 '나라 빚'을 짊어지고 있다. 연간 이자만 계산해도 80조 원이 넘는다.

혹자는 현재 우리나라 재정건전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이라고 말하지만, 단순히 OECD국가를 상대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증가폭과 추세, 절대금액도 중요하지만 '향후 어떻게 빚을 갚을 것인가'에 대한 계획과 전망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도 미국처럼 재정절벽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빚으로 연명되는 경제구조는 언젠가는 터지게 되며 현 세대를 위해 미래 세대를 희생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증세 없는 복지'란 마치 유리로 만든 철이나 원으로 만든 사각형처럼 선후가 맞지 않는 형용모순(oxymoron)이다. 경기불황으로 인해 기존 세수조차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48조 원이나 되는 돈을 증세 없이 어떻게 조달할 수 있단 말인가. 단기적으로 국채를 발행해 임시변통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국가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오바마가 부자증세 카드를 내려놓지 않고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국가부채의 위기는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하고 있다. 미국은 금융기관의 손실을 국가가 떠맡았지만 이는 단지 부채의 장소가 민간 영역에서 공공 영역으로 '이동'한 것일 뿐이며,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에게 투입해 준 막대한 자금은 결국 미국 국민들이 상환해야 하는 부담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 국가 안에서 부채의 연결고리는 복지국가의 '수혜자'들이 오히려 가장 많은 짐을 지는 구조로 전환되기 쉽다. 진보 경제학자들이 계층 간, 세대 간 착취를 고착화하는 기제로 '빚'을 주목하는 이유다. 

지금 세계 각국은 기존 부채를 털어내기 위한 디레버리징(부채 축소) 작업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빚으로 빚을 갚는 방법으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금융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부채의 '거미줄'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태그:#재정절벽, #국채발행, #부자증세, #빚, #디레버리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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