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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불기운을 죽이기 위해 젖은 낙엽을 긁어다 타오르는 불길 위에 덮어씌웠더니 이번에는 뭉클대며 연기가 솟아오른다. 저절로 눈길이 산으로 갔다. 산불 감시 망루에서 봤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오토바이 한 대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산불 감시원이다. 모자를 푹 눌러 쓴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 같으면 따로 변명하지 않아도 이 정도 태우는 것은 눈을 감아 줄 테지만, 초면인 이 사람에게는 그런 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더미에 물을 끼얹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집이라서 '초록 바람 부는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봄부터 여름까지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집이라서 '초록 바람 부는 집'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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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보고 찾아온 사람

불길이 다 사그라지는 걸 보고서야 감시원은 꺼두었던 오토바이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그리고 내게 조심하라며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 접경지역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쓰레기를 태우면 많게는 백만 원에 이르는 과태료를 낼 수도 있다면서 꼭 낙엽을 태워 없애려면 아침 일찍 하라는 조언까지 해주고 떠났다.

그 시간에는 이슬을 맞은 낙엽이 축축할 뿐만 아니라 바람이 잦아있는 시간대라서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질 위험이 적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른 시간이라 산불 감시 망루에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골로 이사하려고 집을 보러 다닐 때 돌담이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나무가 많은 집을 구하고 싶었다. 그때 만난 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다. 돌담은 없지만, 나무는 많은 집이다.

아름드리 참나무 몇 그루가 집을 따라 둘러서 있고 또 바로 뒤는 밤나무 동산이다. 울타리 안에는 커다란 감나무며 뽕나무에 몇 십 년은 족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능소화나무도 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선택한 집이다. 돌담은 없지만, 대신 너른 들판과 뒷산을 덤으로 얻었다. 

참나무의 큰 둥치를 따라 눈길을 위로 보내면 서로 의논이라도 한 양 가지들은 제가끔 알맞춤한 자리에서 밖으로 뻗어 있다. 큰 가지는 작은 가지 여럿을 데리고 있다. 그 일목요연함은 전체가 하나를 위하고 하나는 또 전체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딸네 집에 놀러 오셨던 친정아버지는 우리 집이 자리를 잡은 모양새를 보고 내내 걱정하셨다.

집이 산 밑에 바짝 붙어 있는데다가 큰 나무들이 집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점이 못내 염려스러운 듯했다. 혹여 이웃이 잘못해서 산불이라도 나면 우리 집은 그 불을 피할 수 없을 거라면서 이상만 추구하고 현실을 도외시한 딸네를 딱하게 여기셨다. 그리고는 집 뒤꼍에 쌓여있는 낙엽을 치우면서 큰 나무들은 없애라는 충고를 하시길 주저하지 않으셨다. 

어린 나무는 제 마음대로 가지가 뻗어나가지만 어른 나무들은 모두 둥글어진다.
 어린 나무는 제 마음대로 가지가 뻗어나가지만 어른 나무들은 모두 둥글어진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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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큰 나무가 집 근처에 있으면 나무 그늘이 져서 집 안이 어두울 뿐만 아니라 혹시 비바람에 나무가 부러져 쓰러지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일 터였다. 또 낙엽을 치우는 것도 일이라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집을 보러 다니던 그때 우리 눈에는 나무만 보였다.

잎이 무성하면 낙엽 또한 많으리란 걸 계산해야 했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줄도 몰랐다. 아니 설사 낙엽을 생각했더라도 그때 우리에게 낙엽은 낭만이고 환상이었지 생활로 이어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현실은 도외시한 채 이상만 보았다

처음에 좋게 여겼던 것들은 살다 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봄날의 새순이나 여름날 나무의 그 짙은 녹음(綠陰)은 일상으로 스쳐 갔다. 하지만 늦가을과 겨울 동안의 낙엽 처리가 문제였다. 그냥 놔두면 집 주변이 온통 어수선해지고 긁어서 아궁이에 태우려니까 그것도 일이었다. 낭만은 잠깐이고 처리해야 할 일거리는 겨우내 내게 숙제로 남았다.

봄이 되니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느라 밭을 말끔하게 다듬는 게다. 논두렁도 태우고 고춧대와 들깨 단 같은 농사 부속 쓰레기들은 밭 한가운데 쌓아두고 불을 붙인다. 동네 이곳 저곳에서 하얀 연기가 뭉클대며 피어오르는 게 이즈음의 농촌 풍경이다.

우리 집도 봄이 되면 바빠진다. 농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봄기운이 돌면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그래서 낙엽을 긁어모아 불을 붙였다. 바람도 없는 날인데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낙엽 조금을 태우는 것일 뿐인데 어느새 산불 감시원이 찾아온 것이다. 산 밑에 있는 집이라서 멀리서 보기에는 꼭 산불이 난 것처럼 보인 것일까.

산림과 가까운 곳에서 허가 없이 불을 놓는 경우에는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허가를 받고 불을 놓으라고 산불 감시원은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일을 하다가 보면 언제 신고를 하고 그럴 틈이 있겠는가. 눈에 보이면 바로 치우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일일이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기에는 번거로울 수밖에 없다.

지나가는 바람에 가볍게 춤을 추면서 오늘도 우리 집을 지켜준다.
 지나가는 바람에 가볍게 춤을 추면서 오늘도 우리 집을 지켜준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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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의 박수를 쳐주는 참나무

이렇게 늘 거추장스럽게 여겼던 낙엽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옛날 일이 되어가고 있다. 집 뒤의 동산이 택지로 개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밤나무가 무성하던 뒷동산은 이젠 흙이 붉게 다 드러난 채 방치되어 있다. 서둘러 전원주택 용지로 개발했지만, 웬일인지 집이 들어서지는 않았다. 대신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붉은 물이 우리 집으로 흘러 내려온다. 맨몸으로 비를 맞는 뒷산이 흘리는 붉은 눈물이다.

밤나무 동산은 사라졌지만, 참나무 몇 그루는 살아남았다. 우리 집과 뒷산의 경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사를 들어올 때 참나무 밑둥치에 막걸리를 부어주며 잘 살겠으니 지켜달라고 빌었던 나무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모습을 언제까지나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지난겨울은 '삼한사온'이란 말이 무색하게 연일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집 뒤를 둘러싸고 있는 참나무들은 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한두 해 살았던 몸도 아니니 지난겨울의 추위가 새삼스러울 리도 없었을 게다. 춥다면서 호들갑스럽게 동동거리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혹여 혀를 찼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곧 봄이 오니 조금만 참으라면서 응원의 박수를 쳐주었을까. 오늘도 참나무들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내맡기면서 기분 좋은 듯 가볍게 춤을 추고 있다.


태그:#낙엽, #산불, #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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