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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스톤을 통해 해독되기 시작한 상형문자

로제타스톤 복제본
 로제타스톤 복제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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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을 보고 나서 1층으로 내려온 우리는 입구부터 다시 유물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로제타스톤과 샹폴리옹 사진이다. 로제타스톤이 영국박물관에 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집트 박물관은 사진을 통해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집트에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준 그 귀중한 유물의 원본이 없다.

로제타스톤은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포고령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에는 그 내용이 이집트 상형문자. 당시 이집트 문자, 그리스 문자로 나란히 적혀 있다. 이 비석은 1799년 이집트를 원정한 프랑스 원정대에 의해 나일 삼각주의 서쪽 하구 로제타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프랑스 원정대의 일원으로 줄리앙 성채를 건설하던 부샤르( Pierre-François Bouchard) 가 비석을 발견하고는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 상관인 마누(Manou)와 보나파르트(Bonaparte) 장군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1801년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영국군에게 패하면서 로제타스톤은 자연스럽게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비석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이송되었고, 1802년 이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803년부터 1815년까지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시에도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로제타스톤을 반환받으려고 노력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이집트가 영국에게 로제타스톤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로제타스톤에 대한 연구는 발견과 함께 이루어져, 1802년 이미 그리스어 텍스트에 대한 영어 번역이 나오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로제타스톤 복제본으로 연구를 진행, 그리스어 텍스트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당시 이집트 문자에 대한 연구도 1802년 프랑스 학자 사쉬(A. S. Sachy)와 스웨덴 학자 아커블라트(J. D. Akerblad)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연구는 1814년 영국 왕립학회 국제담당자인 영(T. Young)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로제타스톤의 내용과 형식

로제타스톤을 해독한 샹폴리옹
 로제타스톤을 해독한 샹폴리옹
ⓒ 이상기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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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토대 위에서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샹폴리옹(1790-1832)이 로제타스톤을 연구해, 1822년 이집트 문자에 대한 암호가 어느 정도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현대적인 의미의 이집트학(Egyptology)이 시작되었다. 이집트학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 언어와 문학, 종교와 예술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처음에는 어문학적 연구에서 시작, 고고학과 역사학, 종교와 예술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로제타스톤은 14줄의 이집트 상형문자, 32줄의 당시 이집트 문자, 54줄의 그리스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상형문자는 사제들을 위해, 이집트 문자는 관리들을 위해, 그리스 문자는 지배자들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제타스톤은 기원전 196년 3월 상하 이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4세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았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일종의 포고문이다.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와 같은 존재인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신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전사들에게는 봉급을 주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민중에게 부과된 나머지 세금도 탕감해 주었다. 그는 감금된 사람들도 풀어줘 그들을 오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그는 이집트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로제타스톤의 핵심 내용이다.

나르머 판 이야기

나르머 판
 나르머 판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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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지나 우리는 자연스럽게 고왕국 시대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시대 유물은 46-48, 41-43, 36-37, 31-32호실에 전시되어 있다. 이 중 43호실에는 고왕국 이전 제1왕조 시대 유물이 일부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의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기원전 3050-3100년 나르머 판(Narmer Palette)이다. 나르머 판은 얕은 돋을새김을 통해 나르머 왕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음을 알리고 있다.

나르머 판은 영국의 고고학자인 퀴벨(J E Quibell)과 그린(F W Green)에 의해 네켄(Nekhen)의 호루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네켄은 기원전 3000년대 상부 이집트 수도로 에드푸 북쪽에 있으며, 그리스어로는 히에라콘폴리스(Hieraconpolis)라 불렸다. 점판암 양면에 그림과 상형문자를 새겨 상하 이집트의 통일을 표현하고 있으며, 높이는 63㎝이다.

한 면에는 붉은 왕관을 쓴 하 이집트 왕이 신관의 안내를 받아 적들의 시체를 검열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두 남자가 목이 긴 표범의 목을 묶고 있다. 그리고 표범의 목이 서로 꼬여 원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상하 이집트의 통일을 의미한다. 그 아래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소가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판의 상단부에는 암소 모양을 한 고대 이집트 여신 배트(Bat)가 표현되어 있다. 배트는 사람의 얼굴에 암소의 귀와 뿔을 하고 있다. 배트는 중왕국 시대 이후 하토르 신으로 변화되었다. 

다른 면에는 흰 왕관을 쓴 상 이집트의 왕이 철퇴로 적의 머리를 내리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왕의 발 아래에는 철퇴에 맞아죽은 적들이 두 명 쓰러져 있다. 이것은 사살한 적이 2만 명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왕의 앞에는 호루스가 적의 머리를 낚아 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머리 뒤에는 6개의 파피루스 꽃이 피어 있다. 여기서 호루스는 상 이집트의 왕을, 파피루스는 하 이집트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상 이집트 왕이 전쟁에서 하 이집트의 군인 6,000명을 포로로 잡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왕국 시대 건축과 조각 그리고 예술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왕 조각상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왕 조각상
ⓒ Se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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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통일왕국이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3100년경 메네스(Menes)왕 때였다. 이때부터를 제1왕조라 하고, 초기 왕조시대(Early dynastic period)에 속한다. 메네스는 최근 연구를 통해 나르머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제1왕조는 기원전 2890년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제2왕조가 생겨났고 기원전 2686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초기 왕조시대에 대한 기록이나 유물은 나르머 판 외에는 별로 남아있는 게 없다.

이집트의 역사가 제대로 기록된 것은 제3왕조부터다. 이때부터 고왕국이 시작되고  그 역사는 기원전 2181년까지 약 500년 동안 지속된다. 고왕국은 나일강 하류의 멤피스(Memphis)를 수도로 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다. 고왕국의 시조는 조세르(Djoser: 2691-2625)왕이다. 그는 멤피스에 왕궁을 짓고, 사카라(Saqqara)에 피라미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고, 죽어서는 계단식 피라미드에 묻혔다.

기자에 있는 사각뿔형 피라미드
 기자에 있는 사각뿔형 피라미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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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피라미드는 조세르 왕의 재상인 임호텝(Imhotep)에 의해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시도되었다. 마스타바(Mastaba)로 알려진 정육면체 무덤 위에 탑 형식으로 다섯 개의 마스타바를 얹어 6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겉은 석회석으로 만들었고, 내부는 현실(玄室)과 그곳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제외하고는 잡석으로 채웠다. 그리고 통로를 숨겨 도굴을 방지했다. 당시 피라미드는 62m 높이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현재 높이는 60m이다.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4왕조 시대 사각뿔형 피라미드로 발전한다. 사각뿔형 피라미드는 기자의 쿠푸, 카푸라, 멘카우라 왕 3대 피라미드가 가장 유명하다. 그래선지 이곳 고왕국 시대 전시실에는 조세르, 쿠푸, 카프라, 멘카우라 왕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멘카우라 신상(Menkaura Triads)이다. 상 이집트의 상징인 하얀 왕관을 쓰고 좌우로 하토르와 배트 여신의 호위를 받으며 앞으로 나가고 있다. 회녹색 편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가 95㎝다.

라호텝과 노프레트상
 라호텝과 노프레트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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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의미 있는 것은 석회암으로 만든 라호텝(Rahotep)과 그의 아내 노프레트(Nofret)상이다. 라호텝은 제4왕조를 세운 스네프루(Snefru)의 아들로, '만족한 라(Satisfied Ra)'라는 뜻을 갖고 있다. 라호텝은 목에 목걸이를 하고 짧은 치마를 입었다. 노프레트는 꽃무늬가 있는 머리띠를 하고 몸에 꼭 끼는 원피스를 입었다. 목에는 폭이 넓고 화려한 목걸이를 걸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두 부부의 양팔이다. 그들은 왼손은 아래로 내리고 오른손은 왼쪽 가슴에 대고 있다. 그런데 라호텝은 주먹을 쥐고, 노프레트는 손바닥을 펴고 있다. 라호텝은 건장한 체격을 보여주기 위해 웃통을 벗었고, 노프레트는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하얀 옷을 입었다. 피부 색깔도 남자는 진한 갈색이고, 여자는 밝은 살색이다. 이들 부부상에서는 두드러진 대비(Contrast)를 볼 수 있다.

페피1세 청동상
 페피1세 청동상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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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대의 포세이돈
 그리스 시대의 포세이돈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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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왕국 시대 전시실에는 또한 헤테페레스(Hetepheres) 왕비의 무덤에서 출토된 생활용품이 있다. 헤테페레스는 스네프르 왕의 부인이며, 피라미드로 유명한 쿠푸왕의 어머니다. 그녀가 쓰던 침대, 물건 수납용으로 만들어진 나무함, 팔걸이가 있는 의자, 가마, 팔찌가 들어있는 함 등이 있다. 이들은 지금 사용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시대와 이집트의 연관성을 느끼게 하는 유물로 청동조각상이 있다. 페피 1세(Pepy I) 또는 메렌라(Merenra)의 청동상으로,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있는 청동제 포세이돈, 자키보이, 아우구스투스상의 특징을 앞서서 보여주고 있다. 청동의 재질에서 이들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청동상의 사실적인 표정이나 정교한 조각에서도 이집트의 것이 그리스 로마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차이라면 이집트의 것이 그리스 로마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적이라는 점 정도다. 이곳에서도 나는 또 한 번 유럽문명의 원류가 이집트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태그:#이집트 박물관, #로제타스톤, #나르머 판, #계단식 피라미드, #헤테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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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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