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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시작하기 전에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없애야 …2083은 이슬람 몰아내는 해다. 대화는 끝났다. 무장항쟁이다.…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이 무슬림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이다."

테러범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테러 수시간 전 1500쪽에 이르는 '2083: 유럽 독립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시사토론 웹사이트(www.freak.no)에 올린 글입니다. 브레이비크는 지난 2011년 7월 23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인근 우토야섬에서 발생한 청소년 캠프 총기테러를 자행해 98명을 숨지게 했습니다. 브레이크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범인 신원이 완전히 밝혀지기 전 우리나라 일부 언론들은 용의자를 알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과 관련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테러범은 '이슬람'...십자군은 '성전' 과연 그럴까?

왜 우리 언론들은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슬람을 의심할까요? 우리 언론들이 이슬람교에 대한 악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외신 대부분이 서구 언론 시각을 그대로 보도하거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을 보는 것입니다.

'전쟁광'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은 2001년 9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이번 전쟁은 새로운 종류의 악(Evil)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테러를 응징하는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십자군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악을 응징한 전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악에 가까웠습니다.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
ⓒ 역사의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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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광기에 휩싸여 살육을 일삼고 다녔다고 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이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끼친 폐해는 아주 컸고, 특히 '성스러운 군대', '신의 영광' 등의 거창하고도 숭고한 명분을 생각한다며 그 윤리적 타락 정도는 실로 비참한 것이다. 해방 전쟁, 성전 등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모든 다른 전쟁처럼 십자군 원정도 힘에 중독되어 피를 탐닉하는 인간의 잔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비극이었을 뿐이다." -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

딴지관광청(현 노매드21)에 '파토의 유럽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약 5년 동안 연재한 글을 수정 보완한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원종우 지음 ㅣ 역사의아침 펴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과연 진리일까?"라고 묻습니다.

특히 승자가 쓰는 역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그들이 기록한 역사를 비판없이 받아 들이는 우리들 자세에 딴죽을 겁니다.

2년 전 이맘때입니다. 동네에 신혼부부가 '00못'가를 거닐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연못은 연꽃이 피면 굉장히 예쁜데, 우리 가족도 1년에 두 세번은 가는 곳이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흉흉한 소문이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신부가 윤간을 당해 숨졌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흉흉한 소문을 들은 후 길을 거닐다가 외국인노동자를 보면 순간 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내 몸에 뿌리깊은 '인종주의'....

백인들이 황인종과 흑인종을 차별하는 것만 인종주의라고 생각했던 인종주의는 제 몸에도 배어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깜둥이", "냄새난다"같은 말을 쉽게 합니다. 중국 사람을 '떼놈', 일본 사람을 '쪽발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을 비하하기 까지 합니다. 이처럼 인종주의는 아주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한국인 사이에 통용되는 인간에 대한 상식을 이주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돈 없고 힘없는데도 생김새와 말도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은 힘을 가진 고용주에게 무의식적인 폭압의 빌미를 제공한다. 그 결과 이주 노동자들을 하등한 존재로 대하게 되고, 이런 관념은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합리화 하면서 동물적 가학성마저 촉발시킨다. 이 시점에서 양심은 증발해버리고 일종의 자기최면 상태에 놓이는데 이것은 인종주의 전형적인 심리 유형이기도 하다."(본문에서)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노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원숭이'에 비유한다. 지은이는 이런 언행을 "인종주의 전향"이라며 "여기서 인종주의를 발견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글을 쓴 사람 역시 자신이 인종주의 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종우 글을 읽어면서 내 몸 속에 배인 인종주의가 얼마나 뿌리깊은지 말았습니다. 남탓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흰피부를 가진 백인과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을 쉽게 만납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 마음은 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백인은 아무렇지 않는데, 흑인과 동남아 사람들은 왠지 꺼림칙합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를 걷어낼 때만이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여럿이고 민족은 다양하더라도 이제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하나가 되고 있다. '세계화'라는 표현은 자본의 탐욕을 대변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경제와 낯섦을 허물고 차이를 인종하고 받아들이면서 공존을 꾀한다는 의미에서 세계가 하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이것은 거창한 구호, 제도, 조약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작은 것에서부터 지각하고 실천할 때만 언젠가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를 지은 한비야 교장(세계시민학교)이 만든 '세계시민'이란 단어는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지구상에는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고, 수천개나 넘는 민족이 있습니다. 피부색깔이 다른 인종이 있습니다. 국적과 민족, 인종은 달라도 '시민'으로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 속에는 인종주의를 자연스럽게 제거합니다.

'마녀사냥'시대, 중세를 극복해야....

지은이는 말합니다. 역사는 시간별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십자군 전쟁은 '야만'입니다. 이와 함께 마녀사냥은 중세는 그리스·로마시대 정신문명을 퇴보시켰습니다. 마녀로 고발당한 이유를 보면 중세가 얼마나 정신문명 고갈시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큰소리로 웃는다. 전혀 웃지 않는다. 혼자 중얼거린다. 간질병이 있거나 사시다. 외모가 흉하다. 고양이를 키운다. 피부병이 있다. 몽유병이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고해를 하지 않는다. 낮에 잠을 잔다.(본문에서)

이게 중세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마녀사냥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 진단입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매카시즘'과 1990년대 유고·터키·이라크·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진 인종분규도 "마녀사냥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술문명은 진보할지 몰라도, 정신문명은 퇴보와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극복할 때만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문명의 수준은 부, 과학기술, 법 제도 같은 표면적인 것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문명이 증오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부의 재분배라든가 사회적 기회의 확보와 함께, 증오를 현명하게 통제하는 문명에서는 일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구성원 간의 미움이 만연된 사회는 제 아무리 국내 총생산량이 높다 한들 타의 모범이 될 수 없다.

중세는 과연 끝났는가. 십자군과 마녀사냥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나의 증오가 이데올로기, 신념으로 포장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발휘되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던져줄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 슬로건이나 명분이 아닌 삶 자체가 말이다(본문에서).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는 '좌절과 퇴보'를 통해 극복한다는 것이 지은이 생각입니다. 특히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오류'일 수 있음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오류를 이해할 때... 인종주의 극복할 수 있어

'인류의 오류'를 이해해야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인종주의'와 '십자군 전쟁' 그리고 '마녀사냥'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 선이나 악이 아니며 단지 이익에 의해 선 또는 악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명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이 독자에게 던진 주제입니다.

나는 유럽의 과거와 오늘을 통해 '이성을 통한 근대정신의 달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이성이란 차가운 논리나 계산적인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고,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지성과 용기를 말한다. 또 악한 행동을 비판하고 응징하되,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여러분도, 대한민국도, 다른 어떤 사람이나 나라보다 선하거나 훌륭하지 않다. 한계를 알고 역사와 사회의 교훈을 배워나갈 때, 진정 기본으로 복귀하고 순수함으로 회귀할 수 있는 지혜와 근대가 추구했던 이상에 하루하루 근접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중락) 스스로의 한계와 문제를 알면서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소신 껏 더 나은 생존이 길을 택하는 것, 그렇게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고 용기이기 때문이다.(맺음말)

덧붙이는 글 |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원종우 지음 | 역사의아침 펴냄 ㅣ 18,000원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우리가 알지 못한 유럽의 속살

원종우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2)


태그:#유럽사, #인종주의, #마녀사냥, #인류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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