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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제주도는 고향처럼 친숙한 곳이다. 대학 새내기 때 답사를 온 이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주도를 찾은 것 같다. 제주도에 가까운 친인척이 사는 것도 아니고, 내가 출장이 잦은 영업사원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해는 한 달에 세 번이나 찾았을 정도다. 전생에 제주도와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수학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답사차 제주도에 왔다.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니 16년 교사 생활 중 무려 여덟 번이나 수학여행을 인솔했다. 그 중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여행지는 늘 제주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사전 선호도를 조사해 볼 필요도 없을 만큼 제주도는 고등학생들에게 '관행적'인 수학 여행지가 돼버렸다.

최근 들어 일부 학교에서 부러 수학여행을 해외로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은 탓에 대부분의 학교들이 바다 건너 '해외'로서 이국적인 풍광과 낯선 문화·역사 등을 두루 느껴볼 수 있는 제주도를 수학여행의 최적지로 손꼽는다. 여전히 제주도에는 뭍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수많은 '보물'들로 가득하다. 누군가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을까'라고 평가했을 정도니.

하루하루 변하는 제주도,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사이의 마늘밭이 유난히 푸르다. 제주도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면서 이러한 농경지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 산방산 앞 마늘밭의 촌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사이의 마늘밭이 유난히 푸르다. 제주도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면서 이러한 농경지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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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주도를 찾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제주도의 모습은 무척 어색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광도, 문화도, 언어도, 심지어 공항에 내려서 처음으로 호흡하는 공기조차도 '낯설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뿐, 뭍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익숙함'이 되레 낯설다.

지금 제주도는 섬 전체가 '공사 중'이다. 밀려드는 관광객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라지만, 땅이고 바다고 온통 잿빛 콘크리트로 덮어씌우고 있다. 쪽빛 해변마다 우람한 건물들이 들어섰고, 간선도로는 물론, 울창한 삼나무 숲과 광활한 목장을 가로지르는 중산간도로도 죄다 4차선으로 확장 혹은 포장 중이다.

도로는 마을을 잇는 기능보다 제주도 곳곳에 성업 중인 골프장이나 관광지를 연결하는 통로 구실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긴 탓인지 예전에 없던 레미콘과 대형 트럭 등 중장비들이 '올레길'을 위협하며 도로 위를 내달리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수학여행단을 실은 버스나 렌터카 수만큼이나 많다.

경치 좋다는 곳마다에는 펜션 등 숙박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일렁이는 푸른 바다와 우뚝 솟은 한라산 정상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다'는 것은 이젠 더 이상 제주도에 어울리지 않는 노랫말이 돼가고 있다. 하나 같이 뭍을 닮아가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낑깡(금귤)밭 일구고 감귤을 둘이 가꿔보자'는 노랫말 속 소박한 바람도 지금의 추세라면 조만간 제주도에서는 보기 어렵게 될 듯하다. 금귤밭은 관광지의 주차장으로 덮이고, 감귤나무는 시나브로 '관상용'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제는 제주도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서는 별도로 조성된 관광지를 애써 찾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중산간 마을의 넓은 목초지마다 골프장과 이용객들을 위한 리조트가 들어섰고, '테마파크'라는 이름을 내건 관광지는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는 취지지만, 말 타기 등을 제외하면 하나 같이 제주도와 무관한 것들이다. 거칠게 말해서, 제주도 섬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놀이공원'이 됐다.

그러다 보니 기존 제주도의 이미지조차 180도 달라졌다. 이른바 대문과 도둑과 거지가 없다는 '삼무도'나, 바람과 여자와 돌이 많다는 '삼다도'라는 건 관광지의 문화해설사나 관광버스의 기사의 입담에서나 나오는 얘기일 뿐, 지금의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사라져버린 '제주도다운' 것

'진짜' 제주도를 만끽하려면 배를 타고 우도나 가파도, 비양도를 찾아가라고들 한다. 이미 제주도는 '제주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다.
▲ 협재해변에서 바라본 비양도 '진짜' 제주도를 만끽하려면 배를 타고 우도나 가파도, 비양도를 찾아가라고들 한다. 이미 제주도는 '제주도다움'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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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되레 이런 '패러디'가 생겨났다고 한다. 요즘 '삼무도'(원래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고, 대문이 없다는 뜻)는 제주도 주민 특유의 '괸당'이라는, 텃세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와 토착 언어 그리고 고유의 풍습들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으로 쓰인다. '삼다도'(원래는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는 뜻) 또한 돈과 자동차·중국인 관광객들이 많다는 뜻으로 부른다고 한다. 당최 '제주도다운'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다.

'보물섬'이라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인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라는 명성 역시 퇴색될까 우려된다. 물론,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성산 일출봉과 거문오름 주변 용암동굴들 그리고 한라산 산록의 천연보호구역으로 한정돼 있긴 하지만, 그들을 품고 있는 제주도 전역을 보존해야 할 가치와 당위는 충분하다.

그런데 세계자연유산 지정이 외국 자본이나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되다 보니 섬 전체가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평화의 섬'이라는 이미지도 시나브로 흐릿해져, 그저 클리셰일 뿐이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화한 역사와 미소 냉전의 피를 대신 흘렸다는 4·3 항쟁의 쓰라린 기억조차 개발의 광풍에 덮이고 있다.

값진 세계자연유산이 국적불명의 거대한 놀이공원이 되고, '평화의 섬'을 자처하는 곳에 쓰임새도 불분명한 해군기지가 세워지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있다. 제주도의 가슴 아픈 역사는 교과서에나 한두 줄 기록돼 있을 뿐, 지금 우리들에게 화해와 상생을 위한 그 어떤 성찰도 제공해주지 못한 셈이다.

썰렁한 제주 역사문화 유적지

근대유물로 지정됐지만, 이곳엔 관광객이 거의 없다. 감자밭 건너 왼편으로 6.25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양민들을 학살한 현장인 섯알오름이 보인다.
▲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잔해에서 본 감자밭 풍경 근대유물로 지정됐지만, 이곳엔 관광객이 거의 없다. 감자밭 건너 왼편으로 6.25전쟁 당시 예비검속으로 양민들을 학살한 현장인 섯알오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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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시간을 내 사전 답사를 왔지만, 아이들에게 어느 곳을 보여줄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되레 막막해졌다. 듣자니까 요즘 제주도 수학여행의 대세는 '체험형'이라고 한다. 예컨대, 첫째 날은 승마나 바이크 체험, 둘째 날은 카트 타기나 서바이벌 게임 체험, 마지막 날은 요트나 유람선 체험, 이런 식이다. 그래야 아이들이 만족한단다.

맨 먼저 삼성혈에 들러 제주도의 시조신을 알현한 후, 제주도 고유의 문화를 오롯이 보여주는 곳을 훑어보고, 4·3 항쟁 유적지를 찾아 가슴 아픈 제주도의 역사를 들려주려 했던 계획이 되레 머쓱해졌다. 제주도 사는 한 지인은 "요즘 들어 그런 식으로 수학여행을 진행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며 "제주도까지 와서 아이들을 공부시킬 참이냐"며 나무랐다.

하긴 답사 차 찾았던 역사문화 유적지에는 그 흔한 수학여행 버스를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이른바 학교마다 수학여행의 '피크 시즌'이라는 5월 중순인데도 주차장은 한산하기만 했다. 삼성혈도, 혼인지도, 제주목관아도,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도, 추사 유배지도, 3·1 만세동산도, 너븐숭이도, 4·3 평화공원도, 제주도의 역사와 관련된 그 어디에도 수학여행 온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관광객 역시 드물었다. 기껏해야 배낭을 메고 트레킹화를 신은 '올레꾼'들의 모습만이 간간이 눈에 띌 뿐이었다. 낮에는 '체험형' 관광지를 찾고, 밤에는 불야성의 도심을 거니는 것이 제주도 관광의 '트렌드'가 된 듯하다. 중국인들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영어·중국어·일본어 안내판이 어디든 설치돼 있다는 것만 빼면, 제주도는 뭍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제주도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지만, 그로 인해 잃은 것 또한 적지 않다. "제주도는 더 이상 '제주도'가 아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들린다. 심지어 외국인들과 돈이 물밀 듯이 들어오다 보니 땅값이 서울에 버금가며 인심이 흉흉해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마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걱정이다, 아이들이 홍보물만 주워올까봐

관광지나 숙박업소 어딜 가나 '테마파크 홍보물'이 쌓여있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거대한 '놀이공원'이다.
▲ 제주도 100배 즐기기 홍보물 관광지나 숙박업소 어딜 가나 '테마파크 홍보물'이 쌓여있다. 제주도는 섬 전체가 거대한 '놀이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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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제주도를 보고 싶다면, 다시 배를 타고 우도나 가파도·비양도를 가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머지않아 지금 제주도의 '전철'을 밟게 될 테지만, 아직까지는 이색적인 자연경관과 특유의 공동체 문화가 남아있는 곳으로 곧잘 추천된다. 제주도는 뭍의 여느 관광지와 다르지 않은, 그렇고 그런 곳이 돼버렸다는 고백이며, 제주도에 딸린 그 섬들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하소연이기도 하다.

이십여 일 뒤에 300명이 넘는 아이들을 인솔하고 다시 제주도를 찾아야 한다. 그들이 만나게 될 제주도의 첫인상이 어떨지, 또 돌아가는 길에 무엇을 담아가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제주도 고유의 풍속과 가슴 아픈 역사는커녕, 자칫 관광지 곳곳에 북적대는 상가들의 호객소리와 어디든 꽂혀있는 '제주도 100배 즐기기' 홍보물만 주워담아 오지 않을는지.

광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작별 인사하듯 제주도를 내려다봤다. 20여 년 전 처음 봤을 때의 경이로움은 온데간데없고, 한라산 정상을 감싸 안은 그림 같은 흰 구름이 흡사 제주도를 옥죄고 있는 매연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태그:#제주도, #삼다도, #삼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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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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