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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꽃이 다시 피었습니다
▲ ... 자귀꽃이 다시 피었습니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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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꽃이 다시 왔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올 여름 장마는 예년보다 조금 일찍 왔고 일찍 온 장마가 막 시작될 무렵에 자귀꽃이 만개했습니다. 오월 중순까지만 해도 자귀나무는 홀로 앙상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랬던 자귀나무가 어느새 일제히 함성을 지르듯이 연분홍빛 자귀꽃을 활짝 피웠고 그로인해 산책길이 환해졌습니다.

봄꽃들이 경쟁하듯 꽃망울을 피워 올리고 봄꽃 향연을 이룰 때에도, 새순이 돋고 연둣빛 잎새들이 생생하게 돋아날 때에도 자귀나무는 여전히 앙상하게 서 있었지요. 오월 중순이 지날 때쯤에 하나 둘 씩 잎사귀가 돋나 싶더니 장마와 함께 자귀꽃이 다시 왔습니다. 여름장마를 몰고 왔습니다. 6월의 꽃 자귀꽃이 다시 피었습니다.

시나브로 변해가는 산과 들을 매일 보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정신 없이 앞 다투어 봄꽃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고샅 고샅마다 매화꽃 향기가 맴돌던 사월도 지고, 장미꽃, 아카시아꽃, 하얀 찔레꽃 등이 피어 바람에 향기가 가득 담겼던 5월도 그렇게 지났지요. 시절마다 새로운 꽃이 오고 가고 오고 가고... 자연의 변화를 매일 매일 새로운 경이로 바라보며 놀라곤 합니다. 유월은 자귀꽃의 계절이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배 산딸기가 산책길을 향기롭게 하더니 자귀나무가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폭발하듯 한꺼번에 꽃을 피웠습니다.

자귀꽃이 꽃불을 지피고 절정을 이룰 쯤이면 능소화도 이웃 집 정원 담을 넘어 꽃을 피웁니다. 작년에 왔던 능소화, 왔을까 궁금해 발걸음 해 보았습니다. 능소화도 곧 만개할 모양입니다. 휘어 늘어진 가지마다 한껏 부푼 꽃봉오리들이 맺혔습니다. 장마 지나고 나면 아직 알알을 채우지 못한 옥수수도 알차게 여물어 가겠고 하얀 고추꽃 사이사이에 달린 어린 고추도 땡볕을 받아 여물어 가겠지요. 이웃 집 마당 안에서 특유의 짙은 향기를 내뿜는 무화과나무에도 무화과가 모양을 갖춰가고, 해바라기 꽃 피면, 매일 해를 바라보다가 해바라기씨를 촘촘히 머금겠지요.

다시 왔습니다
▲ 자귀꽃... 다시 왔습니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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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사는 골목 골목 사이 사이에 있는 이웃 텃밭들에선 하얀 고추꽃이 피고 노란 오이꽃도 피고 오이도 모양을 갖춰가고, 연둣빛 포도도 영글어 갑니다. 가지꽃도 피고 가지도 달리고 보랏빛 감자꽃도 흐드러지고 감자도 땅 속에서 조용히 커지고 있습니다. 이른 봄부터 피고 지고 피고 지던 노란 민들레는 지금도 피고 지고합니다. 호박구덩이에 어린 순 돋는다 했더니 어느새 호박줄기엔 호박잎이 무성하고 노란 등잔불처럼 호박꽃이 피어 벌들이 찾아옵니다. 왕성한 생명력입니다.

파브로는 "삶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있다, 인간의 지식은 곤충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결정적인 교훈 앞에선 지극히 미미하다"고 했습니다. 존 베리먼은 또 "미의 대가, 눈송이의 장인, 모방을 불허하는 고안자시며 따분한 달과 달리 너무나 매력적인 이 지구를 허락하신 분이여 이와 같은 선물을 주시니 감사"하다고 말했다지요.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노라면 이 모든 것이 다 기적 같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이 저렇게 제각기 자기소임을 다하는 것을 보며 조금 부끄러워집니다. 자연은 이렇게 말없이 자기 생을 다 하건만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만이 자기 때를 몰라 헤매고 자기 길이 무엇인지 모르고 오래 오래 헤매며 방황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모든 개미는 개밋둑을 쌓을 줄 알고 모든 벌은 벌집을 만들 줄 안다. 그놈들은 우리 식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체득한다. 오직 인간만이 사는 법을 모른다."

자귀꽃이 다시 왔습니다. 유월입니다. 앞다투어 피고 지던 봄꽃들의 왕성한 수다에도 고요히 침묵하던 자귀꽃이 이제야 왔습니다. 제 계절을 알고 왔습니다. 자귀꽃이 절정을 이룰 때쯤이면 능소화도 바통을 이어 받을 것입니다. 덕분에 골목이 환하겠지요. 귀를 쫑긋 내밀듯, 얼굴을 밖으로 향하듯 피는 능소화가 골목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지요. 그 얼굴을 한껏 내밀어 사람 사는 냄새, 사람 사는 이야기에 아마도 내내 귀를 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왔던 자귀꽃이 다시 왔습니다. 새로 왔습니다. 자귀꽃의 계절 유월입니다.


태그:#자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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