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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사상체계에 있어서 최고의 덕(德)이듯이 사회제도에 관한 최고의 덕은 공정(公正)이다.

롤스는 <정의론>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공정한 사회로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제1원칙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제2원칙은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이다. 또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그리고 기회균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국민행복기금'은 애초 취지도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빚더미에 앉은 국민을 국가가 적극 나서 돕겠다는 측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의 재정적 혜택을 가장 크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8조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322만 명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애초의 공약은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대상을 32만 명으로 줄이는 등 대폭 축소됐다.

현 제도의 수혜 대상자인 '6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과 비대상자인 '5개월 연체한 사람'이 겪는 어려움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다르겠는가. 수혜대상을 당초 목표치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연체 기간에 따라 차등 지원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소득층 채무자들에게 폭넓은 제도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게 오히려 성실 체납자를 차별하지 않는 길이다.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공약을 지키는 시늉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확대된 채무탕감정책으로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민행복기금 수혜자의 연평균 소득은 500만 원을 겨우 넘는 수준에 빚은 1200만 원이라고 한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혜자 대부분이 사회적 도움 없이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대부분이 심각한 빈곤층이라는 것과, 그렇기에 이들이 빚을 탕감 받더라도 너무 적은 소득 수준 때문에 언제든 다시 빚의 올가미에 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빈곤층 채무자 위한 적극적 공적부조, 경제회복 위한 투자

행복기금 수혜자 대부분은 공적 부조 없이 경제적 불평등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국가의 도움만 바라게 될까봐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과소평가하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빈곤층이 확대되고,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을 외면하고 방관하는 것이 실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수혜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기보다는 행복기금운영을 넘어 빈곤층의 소득증대와 경제적 자립을 도울 최소한의 안전망 확충과 자금 확보가 절실하다. 궁극적 해결책은 결국 일자리다. 행복기금을 운영하는 캠코는 행복잡(job)이 취업지원 등을 통해 채무자들의 취업을 알선하고, 이들의 취업 후엔 채용기관에 고용보조금을 최대 270만 원까지 지급한다. 하지만 채무자들에게 주는 보조금은 없다.

채무자들의 실질적인 임금을 높이고 자립을 돕기 위해 취업장려보조금을 사업주가 아닌 근로자에게 주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빈곤층 채무자를 위한 적극적인 공적부조 투입은 단순한 세금낭비가 아니라 침체된 경제회복을 위한 투자이기도 하다. 국민행복기금 수혜자들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수혜는 곧바로 현물 소비로 이어지고 내수 경기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결국 성실 납세자들에게 경제적 이득으로 돌아간다. 낙수효과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펌프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포퓰리즘 공약은 선거에서 표만 일단 따고 보자는 식의 인기영합적 성격을 지닌다. 하지만 인기 있는 공약이라고 다 포퓰리즘은 아니다. 선거에서 인기를 끈 복지공약이 제대로 시행되어 공공복지를 증대시키고,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지지도 이끌어낼 최상의 정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국민행복기금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포퓰리즘 공약이 될 운명에 처했다.

박 대통령은 '4·1 부동산 대책'에 이어 최근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하고 토지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 계획관리지역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기로 했다. 이렇게 '있는 자'들이 혜택을 볼 정책은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없는 자'들에 대한 정책은 대폭 축소한다면 대통령은 누구를 위해 정책을 내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국민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 공정한 경제 정책은 무엇일지 다시 생각해보기 바란다.


태그:#국민행복기금, #도덕적 해이, #공적 부조, #펌프 효과,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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