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트라팔가 광장은 나폴레옹이 출격시킨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물리친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해 만들었다. 광장엔 해전을 승리로 이끈 넬슨 제독 동상이 50미터 높이로 우뚝 서 있다.
 트라팔가 광장은 나폴레옹이 출격시킨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물리친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해 만들었다. 광장엔 해전을 승리로 이끈 넬슨 제독 동상이 50미터 높이로 우뚝 서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은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다. 광장 뒤론 국립미술관인 '내셔널 갤러리'가, 광장 앞쪽으론 '화이트 홀'이 지척이다. 또 동쪽으론 '세인트 마틴즈 교회'가, 서쪽에는 캐나다 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관광객 입장에서 보면 트라팔가 광장은 매우 편리한 '관광 코스'의 중심인 것이다.

하지만 트라팔가 광장을 관광객들만 즐겨 찾는 것은 아니다. 휴식을 즐기려는 런던 시민들은 삼삼오오 분수대 근처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청소년들은 주체 못할 싱그러움을 담아 넬슨 제독 동상 아래서 '셀카'를 찍어댄다. 행위예술을 하는 이들이나 소규모 밴드들은 즉석 공연을 한다. 또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싶은 이들은 이곳에 나와 연설을 한다. 서울로 치면 광화문 광장 같은 곳이랄까.

관광객의 수다와 정치 구호, 밴드의 선율이 뒤엉켜 있지만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광장'이기 때문이다. 광장은 원래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소리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반복되는 공간이다. 그래야 광장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광장에 '출입금지' 선을 긋는 순간 광장은 이미 광장이 아니다. 그렇게 죽어버린 광장을 한국에서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트라팔가 광장은 트라팔가해전(海戰)을 기념하여 만든 곳이다. 트라팔가해전은 살라미스해전·칼레해전·한산도해전 등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 1805년 10월 21일, 스페인 연안에 있는 트라팔가 곶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나폴레옹이 출격시킨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 전투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영국에 대한 침략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대륙 봉쇄령' 정책을 편다. 영국의 대륙진출을 막겠다는 '영국 고립정책'이었지만 결과는 나폴레옹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정책이 되고 만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트라팔가 해전을 기점으로 나폴레옹의 시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트라팔가 광장에 높이 50미터에 이르는 넬슨 제독 동상이 서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제독의 동상은 네 마리의 사자 상이 떠받치고 있다. 가장 용맹한 야수의 숭배를 받는 제독. 넬슨은 영국에서 해전에서 승리한 해군 제독 이상의 존재다. 한국인들에게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 그 이상이듯 말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 넬슨을 대하는 영국인의 마음은 이순신을 추념하는 한국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진 파란색 수탉 상

프랑스군을 격퇴해 만든 광장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 동상이 세워졌다. 이 수 탉 상을 만든 작가는 독일인이다.
 프랑스군을 격퇴해 만든 광장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 동상이 세워졌다. 이 수 탉 상을 만든 작가는 독일인이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이렇듯 역사의 의미 깊은 광장에 지난 7월부터 파란색 수탉 상이 등장했다. 수탉(Le Coq)은 프랑스를 상징한다. 프랑스를 물리친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 상이라니. 게다가 이 수탉 상을 만든 작가는 독일인이다.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세 나라의 관계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중국과의 관계만큼이나 곡절이 깊다.

그런데도 트라팔가 광장에 파란색 수탉 상이 세워진 것은 런던시가 주관하는 '네 번째 좌대'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의해서다. 트라팔가 광장엔 모두 네 개의 좌대가 있다. 세 개의 좌대엔 조지 4세 등의 동상이 이미 자리를 잡았는데 광장 북서쪽에 위치한 이 좌대만 비어있었다. 이 비어있는 좌대를 런던시와 잉글랜드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가 지난 2005년부터 공공미술 프로젝트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좌대'에 전시할 후보작품들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약 3개월간 후보작품의 모형들을 전시한다. 그리고 관람객의 평가와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거쳐 최종 전시작품을 선정한다. 독일 작가 프리치의 작품 '수탉'도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네 번째 좌대' 전시작으로 선정됐다.

높이 4.1미터에 이르는 파란색 수탉 상을 다른 곳도 아닌 트라팔가 광장에 설치한다고 했을 때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반대론자들은 '역사'를 이야기했다.

"프랑스 해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만든 광장에 적국 상징인 수탉 상을 세운다는 것은 모순이다. 특히 그 작가가 독일인이라는 것은 1,2차 세계대전의 잔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영국인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행위다."

찬성론자들도 '역사'를 들어 이야기했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은 다 같이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특히 독일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역사를 기억해야할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역사가 주는 경고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영원히 다하겠다는 자세. 이는 독일만의 것은 아니다. 역사가 주는 영원한 경고와 영원한 책임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삼국이 아름다운 유럽 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 책임져 나가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시절 일본군 장교였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넬슨 제독 동상 부조물로 올라가 천진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청소년들.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넬슨 제독 동상 부조물로 올라가 천진스럽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청소년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진 파란색 수탉 상을 보며 서울 광화문 광장에 일본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고양이인 마네키네코(招き猫)의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즉각 고개가 가로저어지는 까닭은 일본이 '역사를 기억해야할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역사가 주는 영원한 경고로부터 최소한의 책임조차 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 12월 당시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의 눈물을 뚝뚝 흘린다. 세계 인류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두고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빌리 브란트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2013년 8월 20일, 독일 메르켈 총리는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 고개를 숙인다. 다하우 수용소는 1933년 3월 나치가 만든 최초의 수용소였다. 1945년 4월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다하우 수용소엔 20만 명이 수용됐고, 이 가운데 4만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메르켈 총리는 "역사를 기억해야할 의무"를 강조했고, "역사의 영원한 경고와 그 책임"에 대해서 다짐했다.

일본에게 '역사를 기억해야할 의무'를 주문하는 문장에 온전히 힘이 실리지 않는다. 일제 식민 통치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해괴한 논리가 교과서 검정 과정을 통과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의 대표 격인 자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대한민국의 국사편찬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국가의 공직을 내주는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통령은 '아버지적 시절'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비서실장 등 요직을 내주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새마을 운동으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자"고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시절 일본군 장교였다.

박정희, 스스로 창씨개명한 일본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일제 잔재 청산은 요원하다. 보수우익을 자처하는 자들이 일본군이 되어 제 민족을 겁탈하려 했던 자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떠받드는 블랙 코미디가 벌어지는 나라. 일본의 행태를 준열하게 꾸짖을 수 없게 만드는 이 기막힌 현실 때문일까, 이국의 광장에 서있는 파란색 수탉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시큰해진다. 

트라팔가 광장엔 관광객은 물론 예술가들, 정치연설을 하는 이들도 즐겨 찾는다. 한 행위예술가가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
 트라팔가 광장엔 관광객은 물론 예술가들, 정치연설을 하는 이들도 즐겨 찾는다. 한 행위예술가가 스파이더맨 복장을 하고 행위예술을 하고 있다.
ⓒ 이주빈

관련사진보기




태그:#박정희, #박근혜?대통령, #이순신, #넬슨, #트라팔가 광장
댓글2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