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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서울은 넓이만큼이나 풍경이 다양하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진은 종로구 동숭동 낙산공원.
 서울은 넓이만큼이나 풍경이 다양하다. 동네마다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사진은 종로구 동숭동 낙산공원.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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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일까. 열심히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선배 S에게 그 동안 찍은 서울 골목 사진을 보여줬다. 시나리오 진도가 나가지 않아 졸린 눈을 비비던 선배는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우와, 이게 진짜 서울이가. 옛날 사진 같은데. 6.25때 사진 아냐? 서울 하나도 안 변했네.나중에 시나리오 완성되면 로케이션 매니저는 니가 해라."(*로케이션 매니저-드라마나 영화 속 배경을 찾아 촬영할 수 있도록 진행하는 사람)

선배는 무척 재미있어 했고, 영화하는 지인들이 놀러올 때마다 로케이션 매니저는 정해졌다면서 자랑을 했다. 나름 부담이 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일 이후 더 열심히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을 누볐다. 

어느 날 선배가 시나리오 한 편을 내밀었다. 추리물이란다. 땀내가 나면서 낡은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 곳이 필요하단다. 그 날 선배를 데리고 세운상가 근처를 돌아다녔다.

'오래된 미로 같은 곳' 세운상가와 옆동네

영화 '의형제'를 찍은 세운상가 일대. 세운상가 일대는 길이 좁고 복잡한데다 사람들로 붐벼 추격신을 찍기에 좋다. 영화 '감시자들'의 추격신도 바로 여기서 진행됐다.
 영화 '의형제'를 찍은 세운상가 일대. 세운상가 일대는 길이 좁고 복잡한데다 사람들로 붐벼 추격신을 찍기에 좋다. 영화 '감시자들'의 추격신도 바로 여기서 진행됐다.
ⓒ 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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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대형 건물군이다. 지하철역 3곳과 나란히 달릴 정도로 길다. 진양상가, 신성상가, 삼풍상가, 대림상가 등 여러 상가로 나눠져 있는데 흔히 세운상가라 부른다. 1968년 지었으니 어느덧 45년 세월을 먹었다.

세운상가는 최근 개봉한 영화 <감시자들>(2013)에서 인상 깊게 나왔다. 특수경찰인 황 반장(설경구)과 하윤주(한효주)가 범죄조직 두목 제임스(정우성)를 쫓는 곳이 세운상가 일대다. 또다른 특수경찰인 준호(이준호)가 제임스를 쫓다 칼에 맞는 곳은 세운상가 가운데 하나인 대림상가다.

세운상가에서 바라본 인근 동네. 작은 공장과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흡사 미로와 같은 곳이다.
 세운상가에서 바라본 인근 동네. 작은 공장과 가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흡사 미로와 같은 곳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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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도 좁은 데다 얼기설기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곳, 게다가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세운상가 일대는 부산스러우면서 생동감을 느끼는 장면을 찍기엔 제 격이다. 과거에 비해 많이 쇠락했지만 지금도 대로변 세운상가쪽은 사람이 붐빈다. 대북공작원과 국정원 직원이 쫓고 쫓기는 과정을 담은 영화 <의형제>(2010)가 마지막 추격전을 세운상가 일대서 찍은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영화 <피에타>(2012)에서 주무대가 된 곳 또한 세운상가 옆 공구거리다. 영화는 어둡고 무겁다. 작품 속에는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 나온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다 그러하지만 세운상가 일대는 그러한 인간의 날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에 적당하다. 특히 대로에서 본 모습과 골목 속으로 들어가 본 모습, 건물 옥상에서 본 모습이 모두 달라 각기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게 세운상가 일대 특징이다.

혹시나 골목 속이나 건물 옥상에서 세운상가 일대 풍경을 보면서 충격을 받는다면 우리들이 대부분 민낯을 숨기며 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마추픽추' 부암동

부암동은 아기자기한 곳이다. 작고 예쁜 가게와 집들이 많아 소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부암동은 아기자기한 곳이다. 작고 예쁜 가게와 집들이 많아 소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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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S가 야심차게 준비한 추리물 시나리오는 결국 제작사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선배는 자기 장기가 추리물이지만 지금은 자기 작품이 선택을 받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TV 드라마들을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평소 안 하던 행동이었다. 선배는 '예쁜 사랑' 어쩌고저쩌고 하는 드라마들을 보면 매우 낯간지러워 했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 물었더니 "아무래도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면 저런 드라마를 봐야 할 것 같다"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선배의 고민을 이해하던 나는 말랑말랑한 작품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장소가 바로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이 품은 동네 부암동이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에서 이선균이 사는 집으로 나왔던 커피숍.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에서 이선균이 사는 집으로 나왔던 커피숍.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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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을 다룬 드라마 <직장의 신>(2013)은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나름 사회이슈를 담았지만, 크게 심각하지 않으면서 웃음요소가 많은 드라마였다. 게다가 인물 간 애정관계를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나름 '달달한' 맛도 느끼게 만들었다.

극중에서 비정규직 주인공인 미스김(김혜수)이 사는 곳은 살사바 마추픽추다. 대부분 사람들이 사는 평지와 떨어져 해발 2057m에 위치한 도시 마추픽추는 자발적 비정규직을 고집하는 미스김과 묘하게 어울린다.

마추픽추가 있는 부암동 또한 마추픽추와 비슷하다. 몇 개 산이 둘러싼 곳에 놓여 있어 일부러 찾기 않고선 보기 힘들다. 청와대 뒤에 있어 오랫동안 개발에 제한을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세상 흐름과는 무관하게 돌아앉은 동네 풍경은 첫사랑처럼 풋풋한 느낌이다.

그래서겠지. 수많은 이들을 '선균앓이'로 내몬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2007)이나 뚱뚱한데다 촌스런 이름이란 콤플렉스를 딛고 '킹카'의 마음을 사로잡는 드라마 <내이름은김삼순>(2005), 세월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린 영화 <동감>(2000)에선 주요 촬영지로 부암동이 등장한다.  그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면 특정 장면을 연상해봐도 좋고, 설령 못봤다 하더라도 옛 달콤한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동네가 바로 부암동이다.

'개성 강한 부자동네' 평창동

평창동은 부촌이다. 북한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어 조용한 동네에 개성 강한 집들이 넘친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인기 있는 이유다. 사진은 영화 '빈집'에서 극중 주인공이 살고 있는 평창동 집.
 평창동은 부촌이다. 북한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어 조용한 동네에 개성 강한 집들이 넘친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인기 있는 이유다. 사진은 영화 '빈집'에서 극중 주인공이 살고 있는 평창동 집.
ⓒ 영화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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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하염없이 지나갔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는 게 어쩌면 사법고시 합격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한참 시나리오를 다듬던 선배는 어느 날 무릎을 '탁' 치며 "맞아, 결국 캐릭터가 제일 중요해"라고 외쳤다.

그 뒤, 한참을 궁리하더니 괜찮은 주인공이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봐. 이 친구는 잘 나가는 연예인이지. 성격이 아주 까칠해. 원래 집도 부유해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작품은 절대 하질 않아. 자기가 갖고 싶은 건 뭐든지 갖는 이 친구가 처음으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여자를 만나. 어때? 재밌지? 이 친구가 살 만한 곳으로 찾아볼래?"

음. 그다지 매력있는 인물로 보이진 않았으나 너무나 기대에 차있는 선배를 실망시킬 순 없었다. 머릿속에 딱 떠오른 곳은 종로구 평창동이었다.

아파트가 없는 동네.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 도저히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높은 담이 쳐있는 이 동네 집들은 개성이 아주 강하다. 유명건축가들이 지은 집들도 꽤 많다. 연예인이나 예술가, 기업 대표, 거물 정치인 등 유명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유명하다. 동네는 매우 조용하고 유명 갤러리들이 많다. 담이 높고 조용해 쉽게 다가서기 힘든 그 무언가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북한산 자락을 타고 들어선 동네라 경사가 아주 가파르다. 굳이 높은 담이 아니더라도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숨이 턱에 차는 걸 느끼게 된다. '신비주의'로 유명한 가수 서태지가 이 동네에 집을 구한 건 꽤 자연스럽게 보인다.

평창동엔 미술관도 꽤 많다. 사진은 드라마 '최고의사랑'에서 주인공 독고진이 사는 집으로 나왔던 김종영미술관
 평창동엔 미술관도 꽤 많다. 사진은 드라마 '최고의사랑'에서 주인공 독고진이 사는 집으로 나왔던 김종영미술관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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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강한 집과 동네 덕분에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꽤 유명하다. 드라마 <최고의 사랑>(2011)에서 괴팍하고 자신감 넘치는 스타 독고진(차승원)이 살던 동네가 바로 평창동이다. '최고의 사랑' 등장인물들이 모임을 하거나 독고진과 구애정(공효진)이 데이트를 하던 곳도 바로 평창동이다.

독고진처럼 '한 가닥 하는' 주인공을 내세울 때 주로 평창동이 촬영지로 등장한다.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2011)에서 평창동에 사는 이민철(이병헌)은 음반업계 실력자이고, >커피프린스1호점>(2007)의 채정안은 직업이 화가다. <지붕뚫고하이킥>(2009~2010)에서 이순재는 중소식품회사 사장으로 나온다. 대략 이 정도 주인공들이 사는 곳으로 평창동이 나온다. 심지어 <마이프린세스>에선 대한민국 최고재벌 후계자인 박해영(송승헌)이 사는 곳으로도 나온다.

오죽하면 과거 드라마에서 '성북동 사모님'과 함께 '평창동 사모님'이 단골대사였을까.

70년대로 가는 타임머신, 홍제동 개미마을

홍제동 개미마을은 70년대 풍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사진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용구와 딸 예승이가 사는 곳으로 나온 개미마을.
 홍제동 개미마을은 70년대 풍경을 담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사진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용구와 딸 예승이가 사는 곳으로 나온 개미마을.
ⓒ 영화 '7번방의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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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토록 강하던 의욕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사그라 들었다. 영화시장은 점점 커져갔지만 감독 데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선배 S는 어느 날 신문 쪼가리를 들고 와서 내밀었다.

"안 되겠어. 일단 찍고 봐야지. 제작사를 못찾으면 어때. 십시일반 주변에서 돈을 끌어모아 찍으면 되지. 저예산 영화를 찍어야겠어. 결국 우리 얘기를 하는 게 가장 진솔하고 힘이 있을 거야. 우리 같은 가난한 영화쟁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거야."

선배가 살던 곳은 홍제동 산 중턱이었다. 홍제동은 오랫동안 개발바람에서 벗어나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시골 재래시장 같은 느낌을 풍기는 인왕시장이나 70년대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개미마을이 유명 촬영지다. 40여년 정도 된 동네 아파트에서도 종종 촬영이 이뤄진다.

1990년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극중 미숙(김지영)이 야채가게를 하던 곳이 바로 인왕시장이다.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2006)에서도 인왕시장이 등장한다.

2004년 영화 <아홉살 인생>은 70년대 경상도 마을이 배경인데, 세트장을 짓는 대신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역시 70년대가 배경인 영화 <고고 70>도 목욕탕 장면 일부를 홍제동에서 찍었다.

홍제동 개미마을은 동네 전체가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 흡사 세트장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홍제동 개미마을은 동네 전체가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 흡사 세트장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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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홍제동에서 찍었지만 사람들에게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들라고 한다면 아마도 영화 <7번방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용구(류승룡)와 딸 예승이(갈소원)이 사는 곳이 바로 개미마을이다. 가난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부녀를 보여주기에 개미마을은 적당하다. 작고 낮은 산이 품고 있는 동네는 참 아늑하다. 볕이 좋은 날 마을버스를 타고 동네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면 산이 품은 동네라는 말을 실감할 것이다.

벌써 세월이 흘러 2013년도 이제 막바지다. 선배 S가 영화를 찍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여전히 서울 산자락 동네에서 열심히 시나리오를 고치고 있을 것이다. 선배에게 힘내라면서 이 말만은 꼭 들려주고 싶다.

"선배, 서울은 얼굴이 천 가지야. 영화배우 같은 곳, 오일장 장사치 같은 곳, 입담 좋은 영업사원 같은 곳, 어눌한 농사꾼 같은 곳, 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연쇄살인마 같은 곳, 말없이 인심 베푸는 김밥할머니 같은 곳 등 모두 구할 수 있으니 시나리오만 완성하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선배와 나눈 대화 내용을 재미를 위해서 각색했습니다.



태그:#서울, #세운상가, #부암동, #평창동,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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