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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잘 둬 터키여행 간다고 사람들이 밥 사라고 난리야."

터키 여행을 앞두고 남편이 한 말이다.

"어이구, 그러다가 밥값이 더 나올라."
"마누라, 생각해 보니까 우리 여행 가는 날 중에 내가 입사한 지 딱 20년 되는 날이 들어있어.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입사 20주년 기념여행이기도 한 거지."

헉!  해석도 가지가지 한다. 내 덕에 여행을 가면서 자기 입사 기념여행이라고. 옆에서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듣던 고등학생 첫째도 한마디 거든다.

"엄마, 내가 계산해 보니까 우리 여행할 때 내가 태어난 지 육천일 되는 날이 들어있어. 신기하지?"

진짜 웃기고들 있네! 웃기고들 있어. 누가 생고생해서 자기들이 여행을 가게 된 건데, 자기들이 여행의 주인공인양 떠들고들 있다.

터키 여행 1등 공신은 '엄마의 일기장' 

87년 1월 19일자 엄마의 일기.
 87년 1월 19일자 엄마의 일기.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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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터키로 여행을 가는 건 순전히 내 덕이다. 터키 여행이 왜 순전히 내 덕인지 이야기를 하려면 두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달 전, 오마이뉴스에서 4인 가족 터키여행권을 1등 상품으로 걸고 가족이야기 공모전을 진행했다. 해외여행 다녀오고 싶은 마음에 어떤 소재로 글을 쓸지 나름 무척 고민했다. 고민 끝에 친정 다락방에서 발견했던 '엄마의 일기'를 소재로 글을 썼다.

그리고 너무나도 고맙게도 나는 공모전에 일등으로 당선되었다. 사실 당선의 제일 큰 공신은 엄마다. 내 글솜씨보다는 소재가 가진 힘으로 1등이 되었다 생각한다. 톡 까놓고 말하면 친정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이 터키로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한 일도 없으면서 숟가락 얹고 좋아하는 남편과 아이의 모습을 보니 살짝 배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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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기'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다. 오빠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전화. 1986년 겨울은 5공화국이 말기로 치닫는 때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던 엄혹한 시기였다. 오빠는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았다. 그 시절엔 옥에 갇힌 자식 생각에 따뜻한 밥을 목구멍에 넘기기 힘겨워했던 엄마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 일을 일기로 남겼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게다가 엄마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라 한글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내가 알기에는 엄마는 맞춤법이 어려워 글쓰기를 항상 꺼렸다. 그런 엄마가 맞춤법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볼펜을 꾹꾹 눌러 또박또박 그때 일들과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용감하게도. 대여섯 장에 불과한 엄마의 글은 5공화국 독재정권의 포악성을 맨얼굴로 드러냈다. 독재자의 손아귀에 있는 자식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몸부림쳤던 엄마의 그 감정은 일기를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내 글을 통해 '엄마의 일기'는 세상에 나왔다. 그건 기록이 가진 힘이었다.

<오마이뉴스>에서 가족이야기의 1등 수상자임을 연락받은 날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렸다. 1등 수상은 엄마의 고통에 대한 위로와 그 기록에 대한 찬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그 고통이 시대의 아픔이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랬기에 터키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터키여행 갈 생각에 입가에는 웃음꽃이 피었지만 27년 전 힘겨웠을 엄마의 아픔이 생각나 눈가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의 일기를 소재로 글을 써 터키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엄마는 무척 좋아해 주셨다. 사람들에게 일기장을 공개해도 되겠느냐 물었을 때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바라던 바다"라고 짧게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내가 어떤 글을 써서 터키로 여행을 가는지 모른다.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엄마의 뜻이기도 하다. 그 당시 겪었던 일들을 아버지가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나는 짐작할 뿐이다. 그만큼 부모님이 겪은 고통은 컸고 당시의 상처를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부모님과 우리는 그 고통에서 멀리 와 있지 못했다. 다만 내 글이 엄마의 상처에 작은 위로라도 되었기를 하고 바랐다.

6년 만에 한의원을 찾은 이유

10월 중순이 되면서 11월 초로 우리 출국 날짜가 잡혔다. 그러자 내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터키 가족여행권은 4인 가족권인데 우리 집 식구는 다섯이었다. 추가비용을 내고 5명이 가야 하나 아니면 누군가를 한 명을 두고 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일단 추가 비용이 얼마인지 그리고 막내인 일곱 살 아이가 따라갈 수 있는 일정인지 여행사에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추가비용은 세금 포함해서 170만 원 정도이고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일곱 살 아이가 함께하기에는 어렵겠다는 거였다.

사정을 들은 친정엄마는 선뜻 막내를 돌봐 주겠다고 하셨다. 공모전에 소재를 준 엄마가 가장 큰 문제까지 해결해 주신다고 하니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나와 남편과 고등학생인 첫째 그리고 초등학교생인 둘째 이렇게 네 사람이 터키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막내 녀석에게는 "터키여행이 너무 힘들에서 못 데려가. 그리고 일곱 밤을 자고 돌아올 거야"하고 말했다. 아이에게 좋아하는 장난감도 사주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 걱정이 된 것은 내 체력이었다. 일주일간 터키 서쪽 지역을 돌아야 하는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여행가기 전에 조처가 필요했다. 한약 생각이 났다. 막내를 낳고 몸조리할 때 한약을 먹고 못 먹었으니 한약을 먹은 지 6년이 되었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내 한약은 항상 우선순위 밖이었다. 이번에도 한약값이 아까워 약 안 먹고 여행을 망치면 더 큰 돈을 날리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돈을 빼서라도 한약을 해 먹는 게 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의원에서 약을 짓고 나오는데 내 모습이 좀 웃겼다. 가족들에게 해외여행권 한번 쏘는 것 때문에 내가 이리 당당하게 한약을 지어 먹는구나 안 그랬으면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으로 한약을 지어 먹었을 텐데. 몸이 안 좋아서 한약을 지어 먹으면서도 상황에 따라서 당당하게 또는 미안하게 감정이 달라지는 내가 참 우스웠다.

터키로 출발하기 열흘 전부터는 터키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딱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터키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우리와 형제의 나라로 6.25 참전군인이 많다는 것 정도이다. 터키 역사에 대해서 짧게 나온 설명을 읽고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성당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 성소피아 성당은 동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었단다. 그런데 그곳이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교도의 교회인데 건물을 보존해서 그곳을 이슬람 사원으로 쓴다니 이런 점이 이슬람 문화가 가진 포용력인가 싶었다.

둘째가 거부한 첫 외식

비빔밥 기내식
▲ 기내식 비빔밥 기내식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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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일요일 오후 11시경에 탑승을 했다. 비행기에 탄 아이들은 싱글벙글했다. 앞좌석에 모니터가 달려 있다.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할 수 있다. 터키까지 가려면 12시간을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면 심심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무원들이 식사를 나눠주었다. 메뉴는 비빔밥이란다. 기내 음식 은박지를 벗긴 둘째가 내게 말했다.

"엄마, 이게 무슨 비빔밥이야?"

내가 보아도 흰밥과 고추장과 참기름을 빼고는 비빔밥이라 볼 수가 없었다.

"야, 먹어 봐.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

옆에 앉은 첫째가 둘째에게 말했다. 하지만 둘째는 고기에 코를 데고는 킁킁거렸다.

"이상한 냄새 나."

그러더니 치즈 케이크와 빵 한 조각만 먹고는 안 먹겠단다. 오만상을 다 찌푸린다. 둘째는 터키여행에서 제일 좋은 게 매일 외식하는 거라 했는데 첫 외식부터 삐걱거린다. 잔뜩 화가 난 둘째는 두 번째 식사 또한 거부했다. 기내에서부터 터키 식사가 입에 안 맞아 싫다고 하니 앞으로는 어떨지 걱정스러웠다.

4인 가족 일주일 여행이라 짐이 많다. 그러고 보니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 여행 가방들 4인 가족 일주일 여행이라 짐이 많다. 그러고 보니 가방이 하나 더 있었다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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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게 된 터키 여행은 패키지 상품으로 총인원이 서른 한 명을 넘을 경우 한인 가이드가 인천공항부터 함께 동승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스물아홉 명이라 가이드는 터키 공항에서나 만날 수 있다고 했다. 한인 가이드를 만날 때까지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팻말을 든 가이드가 있길 하고 기대를 했건만 팻말을 든 가이드는 없었다. 남편은 아직 공항 밖이 아니니 가이드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같은 비행기를 탔던 아주머님이 여행사에서 준 가방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는 동행이라 반가워했다. 동행인 한국인 예닐곱 명이 떼지어 다니며 길을 찾았다. 걷다 보니 문이 나오고 손팻말을 들은 사람들이 보인다. 여행사 팻말을 든 가이드도 보였다. 휴~ 살았다.



태그:#터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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