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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라는 지명이 증도의 어제와 오늘을 상징하는 듯해 재미있다. 증도는 물이 귀하여 물이 '밑 빠진 시루'처럼 스르르 새어나가 버린다는 의미의 '시루섬'이었다. 한자로는 시루 '증甑'자를 써서 '증도(甑島)'였다.

대교가 설치되기 전 증도로 가는 사옥도 지신게
▲ 증도대교와 지진게 포구 대교가 설치되기 전 증도로 가는 사옥도 지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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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앞시루섬'과 '뒷시루섬' 그리고 '우전도'라는 3개의 섬이었으나 앞시루섬과 우전도가 간척으로 합해져서 '전증도'가 되고 뒷시루섬이 '후증도'가 되어 2개의 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이 두 섬간을 간척하여 하나의 섬으로 합쳐지면서 오늘날 '더한 섬, 늘어난 섬'이라는 뜻의 '증도曾島'가 된 것이다. 최초로 섬에 들어온 사람은 한양 조씨 조도흥이 지도 태천에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후 김해 김씨가 1618년에, 밀양 박씨가 1638년에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4개의 다리를 건너서

사옥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증도대교
▲ 증도대교 사옥도에서 바라다 보이는 증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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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에 가려면 4개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먼저 전남 무안군 해제에서 지도로 가는 다리를 건너면 지도읍. 그리고 지도에서 다시 다리를 지나가면 서남해안 최대의 수산물 어판장 송도. 송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사옥도. 마지막으로 사옥도에서 증도로 건너가는 증도대교를 건너야 증도를 갈수 있다. 증도는 육지와 그리 멀지 않는 거리에 있지만 교통수단 때문에 고초가 많았던 섬이다.

60년대 전후 증도 사람들은 배를 타고 걷고, 다시 배를 타고 걷기를 서너 번 반복해야 육지로 갈 수 있는 가장 더딘 섬이었다. 즉, 증도 진번 나루터에서 사옥도 지신개 선착장까지 나룻배로 노를 저어가고, 거기서 사옥도의 탑선 나루터까지 3km를 걸어간다. 탑선 나루터에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지도까지, 거기서 다시 5km 정도를 걸어가서 다시 나룻배를 타고 육지인 무안 해제로 건너갔으니, 증도 사람들이 뭍으로 건너가기까지 모두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연륙이 되기 전, 증도 사람들에게는 나룻배와 연계된 육로편보다 선편이 더 유리했다. 목포까지 3시간이면 갈 수 있고,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증도 버지 선착장까지 철부도선이 운항하게 되면서 차를 싣고 드나들 수 있었다. 증도는 섬이 커서 소금생산과 논농사를 많이 하지만, 유통이 큰 문제였는데 차도선(車渡船)이 대형차들을 싣고와 소금과 벼를 수송하는 것은 거의 혁신이었다. 차도선이 섬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디 이 섬뿐일까마는 증도는 특히 다른 섬들보다 기쁨이 더하였다.

드넓은 염전과 증도대교
▲ 증도 태평염전과 증도대교 드넓은 염전과 증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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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쪽을 향한 최고의 해수욕장
▲ 증도 우전리 해수요장 서남쪽을 향한 최고의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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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관광객들의 차가 들어오면서부터 보물섬으로서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관광의 섬으로 발돋움을 한 것이다. 2004년에는 지도대교(사옥대교)가 완공되어, 사옥도 지신개 선착장에서 증도 버지 선착장까지만 배를 타면 되었다. 특히, 야간운항을 하면서 증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고 지역소득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증도 사람들의 연륙교 해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들에게 증도와 사옥도가 연륙되었다는 것은 절박한 생존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되였다. 위급환 환자를 수송해야 하는데 바람이 많이 불거나 높은 파도 앞에서 절망해야 했던 일, 부모의 임종도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 등 안타까운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제 사옥도와 연륙이 되면서 사옥도 지신개 선착장과 증도 버지 선착장을 연결하던 철부선 증도호는 2008년 3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떠오르는 보물섬 증도

보물이 나온 바다 근처에 건축된 600년전의 약속호
▲ 증도 만들 해역과 트레져 아일랜드 보물이 나온 바다 근처에 건축된 600년전의 약속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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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륙이 준 해택은 참으로 대단하였다. 목포 증도간을 배를 타고 가면 3시간 이상 소요되던 거리가 연륙된 길을 이용하여 1시간 30분이면 닿는다. 교통이 불편하여 지리적으로 낙후되었던 증도는 '보물섬'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보물섬'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목포해양유물전시관과 광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이 이 증도 앞바다에서 인양되었기 때문이다. 1975년 증도면 방축리에 속한 무인도인 도덕도 앞 해상에서 두 명(최영근, 박창석)의 어부가 어로 작업 중에 그물에 걸려 인양된 도자기를 신고함으로써 발굴이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발견된 보물선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유물이었다.

이 배는 1323년 중국 닝보에서 일본 교토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으로 긴급 피란하던 중국선박이 침몰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는 하늬바람인 서풍과 북풍을 이용하여 일본까지 가려고 하다가 고려땅 가까이에서 큰 풍랑을 만난 것이다.

"바다가 조용한 것과 얼굴 예쁜 계집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은 바다 사나이들이 믿는 보편적인 진리라 했던가. 배는 높은 파도를 피하기 위해 서남해안인 다도해 속으로 범선을 피항시키려고 했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근처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 증도의 부속섬 도덕도 이 근처에서 대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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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범선은 700년 동안 깊은 바다 갯벌 속에 묻혀 있다가 인양되었던 것이다. 700년 전의 그 유물선은 난파된 모형 그대로 만들어 증도 검산리 만들 해역 무인도에 다리를 놓고 이곳에 배와 유물을 전시해놓았다. 배이름을 '트래저아일랜드 700년 전의 약속호'라 붙여두었다. 700년 전 풍랑과 싸우던 선원들과 그 가족들의 약속을 오늘 우리가 추모하고자 하는 의미로 필자 나름대로 붙여보았다.

유물이 발굴된 증도 앞바다는 목포에서 43km 떨어진 곳으로 해상은 수심이 20~24m이며 조류가 세찬 곳이다. 중국 송·원대인 14세기 전반기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와 각종 유물들을 1976~1984년까지 10차에 걸쳐 인양함으로써, 한국해양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당시의 조선술과 해상무역에 대한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700여년간 바다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송·원대 도자기 등 2만3024점의 유물이 발굴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유물발굴 이래 증도를 '보물섬'이라 부르니, 말이 곧 현실이 된다 했던가. 실제로, 증도는 2007년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치타슬로chittaslow'(슬로시티의 국제적 공식명칭) 인증을 받았다.

무인도 도덕도 개요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마을 근처에 있다.
▲ 검색리에 방액석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마을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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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도는 증도의 아주 작은 새끼섬으로 무인도다. 바로 이 섬 근처에서 700년 전의 송·원대의 유물선이 발견되어 증도와 함께 유명한 섬이 되었다. 도덕도는 본래 해적들이 숨어 있던 곳으로 '해적섬'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해적들과 도적들의 삶의 고뇌를 품었을 도덕도에 발을 디디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배 한 척 없고 해적들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 섬. 

무심만 파도만 요란스럽게 부딪치고 있는 곳이다. 해저유물발굴기념비가 있는 증도 검산마을은 마을 입구에 방액석이 아직도 남아 있다. 병자호란(1636년) 때 역병(돌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병이 나돌자 임신년 정월(1692년 1월) 스님의 제안에 따라 설치한 것인데, 지금껏 남아 있다.

기록이나 복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장
▲ 상월포 파시의 흔적 기록이나 복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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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목냉기라고도 한다.
▲ 도덕도와 앞 상월포 일명 목냉기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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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다가 검산리 산허리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도덕도와 대섬 등 작은 섬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방축리 서북쪽 마을을 에워싼 도덕도와 대섬 사이로 수백 년 동안 대규모 파시가 성행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곳의 하트 모양의 해변을 '상월포'라고 하며 '목넹기'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자은도의 사월포 파시, 재원도 파시와 함께 부서 파시가 형성되던 곳이다.

아직도 이곳에는 바닷가에 여러 개의 집터들이 있고 고기를 보관했던 창고의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해안길을 따라서 계속 가다보면 방축리가 나오고 조금만 더 가면 수많은 고깃배들이 드나들었다던 방축리 나룻구지 포구가 나온다. 목포에서 손님을 싣고 온 여객선이 이곳 나룻구지까지 와서 정박하고 도덕도 앞바다에서 닻을 내리고 있다가 다음날 목포로 가곤 하던 곳이다. 나룻구지는 이제 분주함은 사라지고 김양식을 하는 배 몇 척만 쓸쓸히 정박해 있다.

도덕도 둘러보기

나룻구지 포구에서 김양식하는 배를 빌려 타고 5분 정도 걸려 도덕도에 들어갔다. 작은 해수욕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아담한 백사장이 증도를 향해 있고, 그 주위에 폐교였던 학교터 건물이 철거된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멀쩡한 집과 조립식 건물 2개가 있는데, 이 집은 양도천 목사가 이곳에서 금욕생활을 하면서 집회를 하던 곳이었다 한다. 2001년까지 집회를 했던 플래카드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증도의 부속섬 도덕도의 북쪽 해변
▲ 도덕도 해변 증도의 부속섬 도덕도의 북쪽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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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나무와 숲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서 도저히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섬이 되어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보니 움푹 들어간 U자 모양의 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도에 내무부에서 나온 도서지에 따르면, 1972년 당시 도덕도에는 7가구 주민43명, 분교생 25명으로 나와 있다. 도덕도는 최고 11가구가 살았고 학교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무인도로 변모 되버린 곳이다. 이 도덕도 바다는 사적 274호로 지정된 곳이다.

증도의 명소로 잡아 잡았다.
▲ 볼거리가 많은 트레져아일랜드 증도의 명소로 잡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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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처 바다에서 약 700년 전 수장되었던 청자·백자 2만661점 (증도에서는 23.024점) 동전 28t(18㎏) 등 국보급 유물이 9년 동안 발굴되어서이다. 바다에서 매년 수천 점씩 건져 올려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그 바다가 도덕도 앞바다이다. 슬로시티 보물섬으로 알려진 증도를 화도와 상월포 파시와 도덕도를 연계하여, 자연과 공존하는 친환경 테마섬으로 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덕도 지리

도덕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에 딸린 섬이다. 연 평균기온 14.1, 강수량 1,172mm. 면적 0.35㎢, 해안선 길이 0.5㎞, 인구는 1973년 내무부 도서지에 7가구 43명, 학생은 25명으로 나와 있다. 목포시에서 북서쪽으로 60km 해상에 위치하며, 북쪽에 임자도와 남쪽에 증도가 있다.

도덕도 가는 길
증도 방축리 나룻구지에서 배를 타고 간다. 썰물때면 갯벌을 걸어서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태그:#상월포 , #파시, #증도 , #목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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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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