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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설이 끝난 도로 위에 10일 오전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 다시 내리는 눈 제설이 끝난 도로 위에 10일 오전 다시 눈이 내리고 있다.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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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지역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기상관측을 시작하고 103년 이래 가장 오랫동안 내리고 가장 많이 내린 눈이라고 한다. 학교 강당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 사는 집이고 가축 기르는 건물이고 폭삭 주저앉은 곳이 허다하다. 경주에서는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강당이 무너지면서 열이나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번 눈 난리를 겪으면서 흔하게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습설'이다.

진부령 98cm…영동 '습설(濕雪)의 습격' (중앙일보 2. 10.)
무거운 습설, 지붕 무너질라 (강원일보 2. 13.)
지붕 위 눈이 건물 무너뜨릴 수도…공포의 습설 (SBS 2. 18.)
최고 80cm 습설… 5t 트럭 38대가 지붕 짓누른 셈 (동아일보 2. 19.)
적설량 75cm… 지붕에 15t 덤프트럭 8대 있는 셈_젖은 눈 '습설의 괴력' (서울신문 2. 19.)

이 '습설'이 도대체 뭔가? 신문 기사를 들어본다.

습설은 수증기를 머금고 있어 마른 눈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간다. (……) 습설이 50cm 쌓였을 때 ㎡당 눈 무게는 50kg 정도다. 하지만 50cm 이상 일 때는 무게가 최고 2배로 늘어난다. (동아일보 2. 19. 사회 6면 기사 부분)

물 먹은 솜 같은 습설(濕雪)은 물기가 적은 건설(乾雪)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간다. 보통 1㎡의 눈이 녹아 물이 됐을 때 무게가 300kg 이하면 건설, 이보다 무거우면 습설로 본다. (중앙일보 2. 10. 사회 13면 기사 부분)

하지만 이 '습설'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우리 말 사전에서 '습설'을 찾으면, '혀' 또는 '설사' 두 가지 뜻만 나온다. 뭐, 그깟 말도 죽은 말에 가깝다.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우리 말을 두고 어쩌자고 괴상한 한자말을 만들어 쓰는가. 습설이라고 쓰고 거기에 '습기 머금은 눈' '濕雪' 같은 군더더기 말을 붙일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젖은눈'이라고 하면 어땠을까?

'비가 섞이지 않고 내리는 눈'을 가리켜 '마른눈'이라고 하지 않은가. 물기가 거의 없어서 포슬포슬한 눈을 말한다. '젖은눈'이 못마땅하다면 '떡눈'이나 '무거운눈', '물먹은눈' '물눈' 따위도 생각해봄직하다. 여기서 '떡눈'은 '물기가 있어서 척척 붙는 눈송이'을 가리키는 북한말이다. 그것도 못마땅하면 '찰눈'은 어떤가? '찰-'이란 '끈기가 있고 차진' 또는 '잘 들러붙고 떨어지지 않는'의 뜻을 더하는 앞가지다.

'습설'이라는 말을 아무렇게나 쓰니까 거기에 견줘 '건설(乾雪, 건조한 눈)'이라는 없던 말도 거리낌없이 만들어 쓴다. 언제나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은 어려운 말이 몸에 배어 그 말이 어려운 줄 모른다. 하지만 신문이고 방송이고 공공기관이고 읽어서 바로 알 수 있도록 말을 써야 하고 그것을 원칙이 삼아야 한다.

말난 김에 '폭설'도 생각해 본다. '폭설'할 때 '폭'는 '갑작스럽다'는 말이다. 갑작스럽게 많이 내리는 눈을 가리키는 '소나기눈', '소낙눈', '큰눈' 같이 써도 너끈한 말이다.

우리 말에는 눈이나 비를 가리키는 말이 상당히 많다. 눈만 찾아봐도 스무 가지가 넘는다. 일테면 가랑눈, 가루눈, 길눈, 도둑눈(도적눈), 떡눈, 마른눈, 메눈, 묵은눈, 밤눈, 복눈, 봄눈, 사태눈, 생눈, 소나기눈(소낙눈), 송이눈, 쇠눈, 숫눈, 싸라기눈(싸락눈, 싸락이눈, 싸리눈, 쌀눈), 얼음눈, 자국눈(자최눈, 자취눈), 잣눈, 진눈깨비(진눈, 진개눈), 찬눈, 첫눈, 포슬눈, 풋눈, 함박눈(함팡눈), 햇눈……. 이 눈들이 내리는 모양이나 성질, 때가 다 다르다.

'습설'이라고 해도 '축축할 습, 눈 설'을 알지 않겠냐고 한다. 하지만 입으로 말할 때 글자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 말이 아니다. 이번에 오랫동안 내린 눈을 두고 '눈 장마'라는 새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말은 얼마나 쉽고 반가운가. 말을 살리는 게 신문과 방송의 사명이다.


태그:#습설, #동해안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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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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