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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토피아> 책표지.
 <나우토피아> 책표지.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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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을 해 보자. 공자와 예수와 부처가 한마을에 산다면? 성인군자들이 모인 마을이니 어떤 어려움이나 갈등도 없이 완벽할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도 더 성숙해지고, 공동체로의 단결력도 더 강화될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이기 때문에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설사 공자와 예수와 부처가 한마을에 산다해도 말이다.

인간의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광기와 야만으로 인류사에 큰 질곡을 낳기도 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우월한 인종인 게르만족만의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수단이었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강제수용소들도 비슷한 명분을 내세웠다.

다수의 꿈을 제어하고 지배하려는 환상에서 비롯된 획일성의 추구는 파시즘과 독재를 낳았다. 

"완벽한 사회가 곧 나타날거라는 생각, 그런 영광스런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바로 유토피아를 속임수로 여기게 만드는 허황된 약속이다. 우리에게 유토피아란 바로 여기 그리고 바로 지금의 삶의 방식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천국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현재를 창조해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을 말한다." - <나우토피아> 14쪽

사회운동가인 존 조던과 이자벨 프레모 부부가 쓴 <나우토피아>는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내부에서 '다른 유토피아'를 실행하며, 자본주의 세계에 기꺼이 대항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오래된 미래'로 돌아간 이들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사회가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기존 사회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현재에 뿌리 박은 미래

저자는 "우리가 방문하고자 하는 곳들은 혁명 이후의 성역도 아니요, 이상주의로 인해 경직된 섬도 아니다"라며 "이 장소들은 오히려 유토피아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 실현가능한 실천의 태도라고 재정의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 '불완전한 천국'인 셈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우토피아'(Nowtopias)는 '여기-천국'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겠다.

"가끔, 이렇게 우리처럼 사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또 다른 때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그게 미친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71쪽)

영국에서 가장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한 마을이라고 평가받는 '랜드매터스'(Landmatters)는 '영속농업'을 통해 땅과 함께 공생하는 삶을 추구한다. 영속농업이란 전통적인 지혜와 현대의 과학적인 생태학을 조화시켜 지속가능한 생활체계를 고안해내는 방식이다.

영속농업은 숲을 단순한 나무들의 집합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돕는 이로운 관계로 이어진 복잡한 조직 내에서 자연의 각 요소가 모든 요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 독립적으로도 스스로 재생이 가능한, 다양성을 지닌 전체적인 시스템으로 본다. 랜드매터스 사람들은 소비지향적 사회가 이끄는 전 지구적 재난을 피할 방법은 자연의 기능, 자연의 회복력으로부터 교훈을 찾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서 지역 주민들과 지속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고 회복력을 갖추는데, 그리고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지구를 돌봄, 인간을 돌봄, 공평한 나눔은 랜드매터스의 변치 않는 철학이다. 이들은 "속도를 늦추는 거야말로 아마도 현재의 우리 문화 속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반체제적인 일일 겁니다"(88쪽)라고 말한다.

무정부주의 학교인 '파이데이아'(Paideia)는 '자유란 가르침을 통해 얻을 수 없으며, 실제 경험으로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학교에서 아이들은 학생과 교육자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분위기속에서 교육 과정 전반을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비로소 자유의 본질적인 개념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 파이데이아 교사들의 생각이다.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 자유관을 거부하는 '파이데이아'의 자유란 능동적인 과정이며,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의식속에 자리 잡은 확고한 의지가 있는 인격을 개발하는 기술이다.

학생들은 자유를 위한 공동체 차원의 상황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운다. 이 매커니즘 속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의 책임이 나란히 존재하며 좀 더 강한 수준의 자유로 이르기 위해 서로를 북돋운다.

프랑스의 '롱고마이'(Longo Mai)는 자신들만의 비전에 따른 다양한 유토피아들이 모인 '군도'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관심사가 다른 여덟 군데의 조합으로 분산되어 있는 '롱고마이'는  '둘, 셋, 여러개의 베트남을 만들자'는 체 게바라의 유명한 호소에서 영감을 얻어 저항의 진원지를 늘림으로써 서로 도울 수 있는 공동체들간의 조직을 이루는데 역점을 둔다.

'롱고마이' 자체를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네트워크'로 보는 관점은 이 프로젝트가 오랜기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저자는 특히 '롱고마이'의 사례처럼 결점이 없는 완벽한 모델을 찾는대신 무한한 '군도'와 같은 유토피아, 즉 '자주적 네트워크'를 건설하도록 노력하자고 제안한다.

아무데도 없는, 그러나 어디에나 있는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결국 역사를 바꾼 새로운 시도들은 주류보다는 변방에서 잉태된다. 인류의 역사는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신영복 선생은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변방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변방성, 변방의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서 "변방의식은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 그 자체이다. 변방성 없이는 성찰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나우토피아>의 저자들 또한 소개된 유토피아들이 '탈자본주의' 상상의 영역에서 유용한 이유를 '변방성'으로 설명한다.

"이 유토피아들이 탈자본주의 상상의 영역에 유용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유토피아들은 다른 시스템 사이의 공간, 즉 변방에서 처음 나타나 지배적 제도들의 시공간적 논리를 거부한다. 다르게 생각하고 창조를 추구할 자유 시간대를 설정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의 기술을 실험하기 위한 공간 및 물질자원을 공급하는 이런 실험의 장은, 계속해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적극적인 간섭과 상호작용에 덜 오염되어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란 실제로 우리가 체험할 때 실현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것이다." (461쪽)

특히 위기 상황일수록 이러한 실험들로부터 영감을 얻고 회복력에 대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불완전한 천국'인 이 유토피아를 일구는 이들은 대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변화를 창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환상과 역사의 종말로부터 현재, 바로 이 순간으로 유토피아를 데려왔다. 새로운 세상은 어떤 완벽성을 갖춘 부동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적응하고 변화하는 역동의 과정일 것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에도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토피아는 우리가 그를 재정복하는 곳 어디에나 있다.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멀리, 역사의 종말로부터 현재의 바로 이 순간으로 유토피아를 데려온 그 지점에 있다. 유토피아는 다른 어디가 아닌 바로 이곳에 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란 이 곳, 그리고 바로 지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유토피아는 현재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미래 또한 당연히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다." (469쪽)

덧붙이는 글 | 나우토피아 | 존 조던, 이자벨 프레모 지음 | 2014년 | 아름다운사람들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실렸습니다.



나우토피아 - 우리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낼 가능성에 대한 실험실

존 조던 외 지음, 이민주 옮김, 아름다운사람들(2013)


태그:#공동체, #유토피아, #자본주의, #마을,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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