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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에서 만난 누이

나는 그동안 네 차례 중국대륙에 흩어진 선열들의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세 번째 답사는 2004년 5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안동문화방송국제작팀과 함께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유적지를 순례한 10박 11일의 대장정이었다. 옌지(연길)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오기 전날인 6월 3일이었다. 그때 우리와 동행하며 중국어 통역을 맡았던 김시준 선생은 조부가 신흥무관학교 김규식 교관인 독립운동가로, 오랫동안 중국에 살아 현지 사정이 밝았다.

그날 온종일 옌지 시내의 항일유적지(연변열사기념관)와 관계 인사(박창욱·김춘선 연변대 역사교수)를 만나도 시간이 남았다. 그러자 김시준 선생은 당신이 저녁을 사겠다고 하시면서 안내한 곳은 옌지시 신흥가에 있는 류경반점이었다. 이곳은 북한에서 직영하는 곳으로, 나는 난생처음으로 북한 일품요리를 맛봤고, 북한 복무원(접대원)도 만날 수 있었다.

류경반점에서 김 선생이 주문한 더덕구이·된장찌개·명태조림 등을 먹었는데 맛이 담백·깨끔했다. 무척 좋았다. 특히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는 내 평생 먹은 김치 중 가장 맛있게 먹은 김치였다. 입안에서 슬슬 녹았다.

류경반점에서 만난 백아무개 북녘누이
 류경반점에서 만난 백아무개 북녘누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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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색동옷을 곱게 차려입은 접대원들은 반찬 나르기가 끝나자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찔레꽃> <휘파람> <다시 만나요>…. 노래가 한 곡 끝나면 실내 손님들이 계산대에서 꽃다발을 사서 그들에게 안겼다. 우리 일행도 꽃다발을 사서 접대원에게 안겨줬다.

"남과 북의 동포는 만나 노래 한 곡 같이 부르면 금세 겨레의 동질성이 회복됩니다"라고, 먼저 경험한 워싱턴에서 만난 심재호 선생(작가 심훈 아드님)의 말씀이 실감났다. 그들은 우리 일행이 떠날 때 문간까지 따라온 접대원들이 눈물을 글썽이는 작별 인사를 했다.

"선생님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요."

그는 백아무개라고 했다. 나는 류경반점에 갈 때와는 달리 매우 아픈 마음으로 연변대빈관으로 돌아왔다.

평양에서 만난 누이

2005년 7월 20일부터 25일까지 평양·백두산·묘향산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했다. 평양 도착 이튿날 시내 관람 첫 곳은 만경대 고향집이었다. 말로만 듣고 TV화면으로만 봤던 대동강변의 휘휘 늘어진 능수버들 길을 따라 만경대 고향집에 이르렀다. 초가지붕에는 여염집마냥 박 덩굴이 7월 뙤약볕 아래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평영에서 만난 누이
 평영에서 만난 누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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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수령님께서는 1912년 4월 15일 이곳 만경대 고향집에서 태어나시어 14살 되시던 1925년 1월 만경대를 떠나셔서 20년 만에 고향집에 돌아오시었습네다. 그때까지 살아계시던…."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검은 머리의 안내원이 마이크를 잡고서 속삭이듯 내뿜는 목소리는 사랑하는 '님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달콤하게 귓전을 울렸다.

그의 애절한 목소리와 미모는 지나는 나그네의 옷소매를 붙잡게 했다. 동행 남정현(소설가) 선생은 그에게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시면서 '어린 시절의 누이를 만난 듯하다'고 북녀(北女)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남남(南男)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부탁하자 내 곁으로 다가와 다정히 포즈를 취해줬다.

"사진을 어떻게 전해 드리지요."
"통일이 된 다음에 주시라요. 선생님, 이름을 외우기 좋습네다. 통일이 된 다음 꼭 만나요."

그 안내원의 단아한 차림과 애절한 목소리는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동행한 정용국 시인도 그 안내원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특별히 선정된 듯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로 차려 입은 대표안내원은 마이크를 잡고 숙연하면서도 넘치는 감정으로 만경대 혁명유적지를 설명하였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과 감정에 복받치는 목소리는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일행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평양에서 길을 찾다>, 화남출판사, 76쪽)

백두산에서 만난 누이

2005년 7월 23일 새벽 백두산 장군봉에서 남북의 작가 200여 명은 '통일문학 해돋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때 북녘 한 시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통일을 기원하는 헌시를 낭독했다. 

"그동안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왔지만 이제부터는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마음껏 합시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자 그는 내 취재 수첩에다가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박경심 시인의 사인
 박경심 시인의 사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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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또 사랑합시다. 우리 민족끼리 2005. 7. 23 박경심"

내가 취재 수첩을 건네받고 손을 내밀자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를 그날 오후 베개봉호텔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박 시인은 오영재 시인과 함께 있다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합석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특히 오영재 시인은 전날 인사도 나누고 함께 기념촬영도 한 사이라 마음 속 이야기도 했다.

오영재 시인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중학생으로 인민군 의용군으로 참전한 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피울음을 토하듯 써서 북한에서 계관시인이 됐다. 그때 오 시인은 나와 박경심 시인에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 뒤 이렇게 말했다.

북녘 박경심 시인과 오영재 시인(오른쪽)
 북녘 박경심 시인과 오영재 시인(오른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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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사진만 찍지 말고 연애하라요."
"우리는 같은 박씨라서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무시기야. 일없수다."

나는 그분이 말한 연애를 내가 형이하학적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아마도 그분은 남북작가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그래야 이 땅의 통일이 단축된다는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늙지마시라
늙지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평양에서 만난 북녘누이(왼쪽 기자)
 평양에서 만난 북녘누이(왼쪽 기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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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영재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중에서

그 오영재 시인은 남녘에 사시는 어머니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이태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나는 재일동포 문인(오홍심 도쿄 시인회 대표)을 통해 들었다. 

"오라버니,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요."

북녘누이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통일이 되면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과연 내 생전에 통일이 돼 그 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나는 이따금 내 컴퓨터에 저장된 그 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려 본다.


태그:#통일,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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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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