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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광진과 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 한강의 5대 나루로 손꼽혔다. 그 가운데 노량진은 상류의 한강진, 하류의 양화진과 더불어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어서 이곳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군대가 주둔하였다.

노량진은 수양버들이 울창해서 '노들나루'라고도 불렸고, 노량진 앞에 떠있는 한강의 하중도(河中島) 이름도 노들섬이다. 노들나루 노량진의 한강가 언덕배기에 사육신묘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한강대교 옆 노들나루 공원으로 들어서면 사육신묘 공원이 보인다.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6명의 신하들 사육신(死六臣). 학창 시절 누구나 들어본 역사적 사건의 인물들일 것이다. 선죽교에 붉은 피를 남긴 정몽주 이후 한반도를 대표하는 충신의 대명사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 임금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신하들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에게 저항하고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그런데 정작 사육신묘를 돌아보다보면 7기의 무덤이 보인다. 이상하다, 충신은 여섯인데 무덤은 일곱이라니···. 그럼 원래는 사육신이 아니라 '사칠신'이었던 것일까? 사육신묘 공원을 돌아보고 공원 안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에 들어갔다가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충절과 의리의 상징, 사육신묘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에서 한 시민이 묵념을 하고 있다.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에서 한 시민이 묵념을 하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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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둥둥둥 갈 길을 재촉하는데 / 서녘 하늘에 해는 저무는구나 / 황천길에 주막집은 없다던데 / 오늘밤은 어디서 자고 갈거나.'

- 수양대군(世祖)에게 무참히 국문을 당하고 거열의 형(車列之刑)에 처해져, 사형장인 새남터(한강가 서부이촌동 철길 부근)로 끌려가면서 당당히 읊은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의 시

왕릉이나 관아 앞에 서 있는 붉은 홍살문이 사육신묘 공원 입구에도 높이 서 있어 이채로웠다. 사람을 피하지 않고 여유로이 산책을 즐기는 들고양이와 함께 홍살문 아래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불이문(不二門)이다. 그 첫걸음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사육신의 결연한 의지가 전해진다.

입구는 물론 사육신묘 공원 곳곳은 벚나무, 잣나무, 버짐나무 등 나무들로 울창해서 요즘 같은 더운 날씨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상쾌한 기분이 드는 곳이다.

동네 주민들은 물론 인근 학원가에서 온 학생들도 찾아오고 있었다. 옛 역사의 공간이자 후손들의 좋은 쉼터가 된 것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육신묘는 세조에 항거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이어 후일 김문기가 추가된 일곱 충신 절사의 묘역이자 성역으로 가꾸어져 있다.

사육신들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뒤편으로 사육신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지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과도 같은 나지막한 언덕엔 '아차고개'라는 흥미로운 이름이 붙었다.

아차고개에 어린 전설도 있다. 영등포에 살던 선비가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아차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죽음을 맞았다. 한 발 늦었구나 하는 '아차'하는 탄성이 그 고개의 이름이 됐다. 아마 오랜 세월 지나며 하나로 이어진 애도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아차고개를 넘자 비로소 사육신묘가 보인다. 죽음으로 전한 이들의 충정 때문이었을까, 7개의 묘 비석에는 이름도 없이 '이씨지묘(李氏之墓)'와 같은 식의 글자만 적혀있고, 여느 무덤처럼 소박하고 그저 가지런하지만 마음을 정숙하고 정갈하게 하는 기운이 전해진다. 으리으리하게꾸민 명사들의 무덤보다 한결 마음속에 가깝게 다가왔다. 한양을 등진 묘지들은 그래도 남동쪽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박하고 나지막해서 마음속에 가깝게 느껴지는 사육신묘.
 소박하고 나지막해서 마음속에 가깝게 느껴지는 사육신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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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 공원은 나무들로 울창한 도심속의 초록지대이기도 하다.
 사육신묘 공원은 나무들로 울창한 도심속의 초록지대이기도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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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 자리한 사육신 역사관에 들어가면 나이 지긋한 여성 문화 해설사를 통해 역사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역사관도 처음엔 '단종충신역사관'으로 개관했다가 여러 논란을 겪고 지금의 '사육신 역사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역사관 2층엔 현장감이 담긴 음성과 영상으로 당시의 사건과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단순한 유적지 관람이 아닌 당시의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육신 및 그들과 뜻을 같이한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대 말 사육신묘에 추가로 묻힌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사망하였다.

사육신묘는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주변으로 수목이 풍성하고 넉넉한 산책로를 만들었다. 묘소에서 예를 올린 후에는 가볍게 공원의 자연을 만나도 좋을 듯하다. 풀벌레 소리,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낮잠 자고픈 넉넉한 정자도 있고,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걷기좋은 공원 산책로엔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한강 조망대도 있어 해 저물 녁에 오면 멋진 강변 낙조도 볼 수 있겠다.

삼중신 김문기, 사육신묘에 묻힌 연유

사육신묘 공원안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 이곳에도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을 볼 수 있다.
 사육신묘 공원안에 있는 사육신 역사관, 이곳에도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을 볼 수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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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절사에 모셔진 사육신의 위패 앞에서 어머니를 따라 분향을 하는 아이.
 의절사에 모셔진 사육신의 위패 앞에서 어머니를 따라 분향을 하는 아이.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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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당시 어느 스님이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버려진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생육신(生六臣)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 여섯 신하의 일대기를 전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때부터 이들 여섯은 '사육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을 뽑은 것은 남효온의 개인적은 판단으로 학계에서는 다른 사육신들과 달리 김문기는 혼자 처형당하고 가족들이 화를 당하지 않고 대를 이어 사육신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육신의 부모와 자식들은 모두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받았는데, 이 형벌은 역모나 모반에 내려지는 가혹한 형벌이다. 삼족이라 함은 당사자(본인과 형제)의 윗대(아버지)와 아랫대(자식)의 남자는 모두 처형하고 여자는 노비로 부리는 가혹한 형벌이다. 한마디로 가문의 명맥이 끊어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것이다.

이들이 단종 복위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꼭 여섯이어야 할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훗날 정조 임금은 사육신 외에 육종영(6명의 종친), 삼상신(3명의 재상), 사의척(4명의 의로운 외척), 삼중신(3명의 중신) 등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다양한 신하들을 공인했다. 현재 사육신묘에 사육신으로 함께 묻힌 김문기는 삼중신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8년 사육신묘를 성역화하기 얼마 전, 김문기의 후손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는 진정을 냈다. 그 근거는 <세종실록>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성삼문 등 다섯 사람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한 달 이상 고심하던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김문기의 행적을 인정하고 현창하되, 사육신은 그대로이다' 라는 어쩡쩡한 결론과 함께.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으며 신문 지상에 논설이 게재되어 논란을 만들기도 하였다.

'사육신' VS '사칠신'... 후손들 끝없는 다툼

여기에는 조선초 역사와는 상관없는 배경과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자랑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바로 김문기의 후손이었다는 것. 국사편찬위원회가 오래 고심한 것도, 편법으로 보이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린 것도 모두 김재규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논란,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하는 사육신에 김문기 선생은 제외된다.

똑같은 반란이라도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이듯, 역적과 충신 또한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한 사육신이 충신이 되는 과정 또한 그랬다. 생육신(生六臣) 남효온이 쓴 <육신전(六臣傳)>을 본 선조 임금이 "이들은 충신이 아니라 불공대천(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의 역적들"이라면서 불태워버리라 명령했듯이, 만약 세조처럼 왕권이 신권을 압도한 시대가 지속됐다면 사육신은 여전히 역적의 대명사였을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사림파가 왕권을 능가하는 신권을 구축하면서 사육신은 비로소 충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목숨을 버리며 충절을 지킨 사육신이나, 보장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못된 권력과 등을 돌리며 평생을 수절한 생육신들의 의리는 오늘날 도탄(塗炭)에 빠진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며 나서는 위정자(爲政者)들이 반드시 받아야 할 교시이자,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 덕목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 위치 : 전철 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 9호선 노량진역 2번 출구 및 노들역 1번 출구에서 5분 거리
○ 사육신 공원내 역사관 : 02-813-2130 (입장료 없음, 일요일과 월요일 휴무)
○ 사육신공원은 연중무휴 개방



태그:#사육신, #노량진 사육신묘, #사육신 역사관, #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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