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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의 빽빽한 주택가 사이에 숨어 있는 듯 자리한 초록지대 망원정터.
 단층의 빽빽한 주택가 사이에 숨어 있는 듯 자리한 초록지대 망원정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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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서울 한강의 양화대교 북단 자전거 도로를 달리다보면 '마포 나룻길'이라는 안내 푯말이 보인다. 서울시에서 지정한 마포구의 걷기 좋은 길로 전철 합정역과 마포역 사이의 강변길이다. 옛 선인들의 문화와 역사 속의 이야기가 담긴 문화재와 근대의 유물 등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마포 나룻터는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양천·김포 방향으로 나가는 큰 나루터로 수상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군사상 요충지였던 양화진 나루터, 조선말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어간 연유로 원래 이름 잠두봉에서 이름이 바뀐 절두산, 대한제국 시절 우리나라로 건너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힌 묘지공원 등의 명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강 자전거도로 너머 차들이 오가는 강변북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옛 누정(樓亭) 망원정터도 있다. 망원정은 한강의 수려한 경치를 굽어보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던 명소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직접 가보니 그럴 만했다. 근처의 동네 마포구 망원동은 바로 이 정자에서 딴 동네 이름이다.

한강 자전거도로를 달리다 양화대교와 성산대교 사이에 있는 망원 나들목으로 나가면 단층의 오밀조밀한 주택들과 함께 망원정터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대중 교통편은 2호선 합정역 8번 출구로 나와 도보 20분) 동네 골목 끝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등장한 망원정터, 빽빽한 주택가 사이에 나무들 무성한 초록지대이자 옛 문화재가 있는 게 무척 신기했다.

두 명의 '왕의 형'을 모신 정자

망원정터 안에는 여러 들꽃과 뱀딸기 등이 살고 있어 숲속같다.
 망원정터 안에는 여러 들꽃과 뱀딸기 등이 살고 있어 숲속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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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이름 '망원동'의 유래가 되기도 한 누정 '망원정'
 동네 이름 '망원동'의 유래가 되기도 한 누정 '망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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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정은 서울시 기념물 제9호 문화재로, 이 하나의 정자에는 두 명의 주인이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두 주인은 '왕의 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초기 칼로 일어선 태종(이방원)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이 그 첫 번째 주인이었고, 조선 최고의 모사 한명회(韓明澮)의 입에 의해 왕의 자리에 앉지 못한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그다음 주인이었다.

현실정치를 멀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왕의 형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시와 풍류였다. 아우인 왕이 찾아와 시를 나누고 자연을 감상하는 공간이 없었다면 그 형들은 제 명에 죽지 못했을 것이다. 망원정은 혈족으로 아우인 왕과 권력으로 두려움인 왕으로부터 형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완충지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완충지대에서 왕의 형들은 먼 곳의 풍경을 즐기며 가까운 욕심을 버리고 또 버림으로써 다른 형제와 혈족들이 유배를 가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아가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자의 첫 번째 주인이었던 세종 임금의 형인 효령대군은 세종대왕 6년(1424년)에 이 별장을 지어 약간의 농사도 지으며 한강의 물결을 감상하며 즐겼다. 누정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수양과 독서, 산책을 하는 공간이었고, 배를 띄워 선상연회를 열고, 강가에 지은 정자에서 시주(詩酒)를 즐기거나 강론을 하는 사교와 문학의 장이었다. 문화공간으로서 한강을 더욱 풍성하게 한 곳은 동호와 서호가 쌍벽이었다. 오늘날의 동호대교 위쪽에 펼쳐진 너른 물길이 동호에 해당하고 양화대교 아래가 서호다. 동호는 중랑천이 합수되며 강폭을 넓히고 서호는 홍제천이 합수되며 그 폭을 키웠다.

강변길이 나있었을 망원정터의 대문 앞엔 차들이 지나가는 강변북로가 나있어 문이 굳게 닫혀있다.
 강변길이 나있었을 망원정터의 대문 앞엔 차들이 지나가는 강변북로가 나있어 문이 굳게 닫혀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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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물길의 수면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강변을 따라 앞 다투어 지어진 정자마다 흥과 시가 흘렀을 것이다. 그 많던 한강 변 조선의 정자 가운데 오늘날까지 제 모습을 간직한 것은 거의 없다. 도시와 한강 개발 열풍을 따라 많은 정자를 다 밀어내 버린 탓이다. 망원정은 그렇게 다 사라져 버린 한강 변의 정자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는 정자다. 1925년 큰 홍수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9년에 복원되었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망원정 앞은 지금의 강변북로가 되었으며, 주변 일대에는 주택가가 조성되었다.

<궁궐지>에 의하면, 세종 7년(1425)에 가뭄이 계속되자 농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서쪽 교외로 나왔다가 효령대군의 정자에 올랐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니 매우 기뻐하며 정자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효령대군은 왕이 행차한 것은 물론 정자의 이름까지 지어준 것에 감사하여 글씨로 이름을 날리던 부제학 신장(申檣)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문장을 잘 짓는 변계량(卞季良)에게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변계량은 기문에서 "희우정의 제도는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다. 북악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는데, 서남쪽의 여러 산들이 막막하고 아득하여 구름·하늘·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하다. 굽어보면 물이 맑아 물고기, 새우도 역력히 셀 수 있다. 바람 실은 배의 돛과 모래 위의 새들이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고,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가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여 날개가 돋아 푸른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 마음이 자유스러워져서 바람 타고 신선세계에 노는 것만 같다. 눈이 아찔하고 머리털까지 곤두서는 듯하다" 고 칭송하였다.

세종은 그 후로도 수차 이곳 희우정에 들러 서교(西郊)에서 벌이는 군사들의 방포·말타기·활쏘기 등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짓고 그림도 그리게 하였다. 이 당시 따라왔던 안평대군이 그린 <도원몽중도첩(桃源夢中圖帖)>이 지금 일본 덴리쿄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지은 서글픈 시가 담긴 곳 

동네 주민들이 누정에 놀러와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고 있다.
 동네 주민들이 누정에 놀러와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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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북로와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정자안, 첫 번째 이름 '희우정'의 현판이 걸려있다.
 강변북로와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 정자안, 첫 번째 이름 '희우정'의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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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성종 15년(1484)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퇴락한 희우정을 효령대군으로부터 얻어 고쳐 짓자 성종이 '望遠亭(망원정)'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망원정은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를 잘 바라 볼 수 있음을 뜻한다. 월산대군은 망원정에서 보이는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하여 <한성십영(漢城十詠)>의 한 곳으로 손꼽았다.

이후, 연산군 12년(1506) 7월 연산군이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공사를 하던 중 그 해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망원정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잠두봉(현 절두산)과도 가까워 잠두봉으로 가는 길에 들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망원정터 입구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이름을 기재하고 누정으로 나있는 돌계단을 걸어 올랐다. 초록의 우거진 나무들과 예쁜 들꽃들, 보기 드문 빨간 뱀딸기가 방문객을 먼저 맞이해 주어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나무와 수풀이 가득해서 인지 꼭 숲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빌라, 연립,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작지만 이런 초록 지대의 정자가 있다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망원정 정자에 올랐다. 정자에 올라서자마자 강바람이 시원하게도 불어와 자연스레 심호흡을 하게 된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기분에 머리까지 맑아졌다.

정자 발치로 유유히 흘렀을 강물 대신 강변북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덕택에 망원정은 24시간 자동차 소음에 무방비로 노출된 곳이기도 하다. 강변북로 뒤로 펼쳐지는 한강이 한 눈에 펼쳐져 예전엔 얼마나 시원하고 아름다운 강변 풍광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귀여운 손녀와 정자에 놀러온 주민 할머니는 학생들이 탐방하러 찾아오기도 하고, 중국이나 일본 외국인들도 관광코스로 들린다고 한다. 전에는 무더운 한여름엔 늦은 밤까지 정자를 열었는데, 관리가 어려워 지금은 오후 6시까지만 문을 연다니 아쉽다. 강바람이 어찌나 시원하게 불어오는지 한여름의 열대야도 잊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정자 안쪽에 정자의 옛 이름인 '희우정' 현판이 걸려있고 '망원정' 현판은 강변북로 쪽의 정문에 걸려있다. 한강으로 가는 강변길이 나있었을 대문 앞은 차들이 지나가는 강변북로가 나있어 문이 굳게 닫혀있다. 효령대군에게 양도받아 망원정의 주인이 된 월산대군이 망원정에서 지었다는 시가 마음을 짠하게 했다. 망원정은 한명회에 의하여 아우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난 후, 아픈 척 병을 가장하고 무심한 시(詩)를 내세워 연명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서글픈 사연이 담긴 누정이기도 했다.

望遠亭前三月暮 망원정 앞에 춘삼월이 저무는데
與君携酒典春衣 그대와 술 마시려 봄옷 잡혔네.
天邊山盡雨無盡 하늘가 산은 다하여도 비는 그치지 않는데
江上燕歸人未歸 강의 제비는 돌아가도 사람은 돌아가지 못하네.
四顧雲煙堪遣興 안개를 돌아보니 흥을 풀 만한데
相從鷗鷺共忘機 갈매기와 서로 좇아 사심을 잊는다.
風流似慰平生願 이 풍류가 평생의 소원을 위로할 듯하니
莫向人間學是非 인간세상 시비를 배우지 마세.
― 월산대군 〈저문 봄……〉 《풍월정집》

덧붙이는 글 | 서울시 온라인 뉴스에도 송고하였습니다.



태그:#망원정, #희우정, #효령대군, #월산대군, #마포나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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