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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항쟁68주기 추진위원회는 1일 오후 6시부터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항쟁 희생자 추모제를 열었다.
 10월항쟁68주기 추진위원회는 1일 오후 6시부터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유족과 시민단체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항쟁 희생자 추모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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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옆 가창댐 주변에 돌무덤을 만들고 '영원히 잊지 못할 슬픈 무덤'이라고 써진 나무비석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길을 매일 나무를 하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 목석에 써진 글귀가 너무나 슬퍼 한참을 울었습니다..."

채영희 10월 항쟁 유족회장의 눈시울이 붉게 충혈됐다. 얼마나 울었는지 이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며 연신 먼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채영희씨의 아버지는 1946년 10월 항쟁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채영희씨의 아버지처럼 끌려가 대구교도소 등지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은 1950년 6월과 7월 대구 가창골, 앞산 빨래터, 경산 코발트광산 등에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했고 그 유족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며 살아야 했다.

어릴 적 아버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유족들은 벌써 7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추모에만 머무를 수 없다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경산코발트유족회와 10월 항쟁 유족회 등 25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10월 항쟁 68주기 행사위원회가 주최한 '68주기 10월 항쟁 정신계승 및 희생자 추모제'와 대구경북작가회의가 주최한 '1946 10월을 넘어 2014 평화를 노래하라' 10월문학제가 1일 오후 6시부터 2시간 30여분에 걸쳐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렸다.

"국민과 유족에게 사과하고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해야"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우너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희생자 추모제에서 유족들과 행사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우너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희생자 추모제에서 유족들과 행사 참가자들이 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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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가한 100여 명의 유족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은 대구의 10월 항쟁이 갑오농민전쟁, 3.1운동과 함께 3대 민중항쟁으로 기록될 만큼 미군정과 친일세력에 맞서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한 정의로운 투쟁이었다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들은 지난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과거의 아픔을 가진 분들을 만나고 더 이상 상처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며 "10월 항쟁 역사의 복원과 피해자 치유를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가자들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 "10월 항쟁 시기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폭력에 대해 국민과 유족에게 사과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당시 희생자들은 10월항쟁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며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친일잔재 청산 등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희생자 추모제에서 마임니스트 조성진씨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희생자 추모제에서 마임니스트 조성진씨가 진혼무를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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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가 끝난 후 대구경북작가회의 주최로 열린 10월문학제에서 배우들이 시극을 하고 있는 모습.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가 끝난 후 대구경북작가회의 주최로 열린 10월문학제에서 배우들이 시극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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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박정희씨가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 후 열린 10월문학제에서 진혼무를 추고 있다.
 무용가 박정희씨가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 후 열린 10월문학제에서 진혼무를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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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해 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1946년 10월 미군정 치하에서 식량배급에 대한 불만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이를 규탄하기 위해 뜻을 같이 했던 시민들이 궐기한 사건이 대구의 10월 항쟁"이라고 말했다.

양 회장은 이어 "그동안 10월 항쟁은 오랜 세월 이념적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돼 왔으나 이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올바로 정리하고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일에 국민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영희 유족회장은 "깊고 슬픈 인생을 산 유가족들이 떠나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들을 발굴하고 가야 한다"며 "학살의 현장에 평화공원을 만들고 여기 모인 분들의 마음을 담아 위령탑을 건립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마임니스트 조성진씨의 진혼무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흐느낌이 들려왔다. 참가자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랜 침묵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추모했다.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에 내걸린 만장에 씌여진 추모시. 대구경북작가회의는 추모제가 끝난 후 10월문학제를 열었다.
 1일 오후 대구2.28기념공원에서 열린 10월항쟁 68주기 추모제에 내걸린 만장에 씌여진 추모시. 대구경북작가회의는 추모제가 끝난 후 10월문학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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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주변에는 대구경북작가회의 소속 시인들이 쓴 추모시가 만장으로 흩날렸다. 김창우 경북대 교수의 연출로 시극 '시월'이 이어졌다. 고희림 시인의 시 '인간의 문제' 낭독을 시작으로 시낭송과 시극이 계속 됐다.

대구경북작가회의는 이에 앞서 이날 오후 2시부터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세미나실에서 지역작가 토론회 '문학 형상화-창작을 중심으로'를 열고 10월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시첩 <10월은 계속되고 있다>를 발간했다.

한편 10월 항쟁 유족회와 대구민예총, 10월문학회 등은 2일 오전부터 10월 항쟁이 일어났던 대구의 도심을 돌아보고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 일대를 둘러볼 예정이다.

10월 항쟁이란
10월 항쟁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의 실패한 식량정책에 대한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산하 노동자들이 10월 1일 저녁 대구시청(경상감영공원) 앞에서 기아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촉발됐다.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쏜 총탄에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자 다음날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은 총을 난사해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비극이 발생했고 대구시의사회가 시민에게 발포를 중지하라며 "동포에게 발포한 경관 부상자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동참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미군정은 10월 2일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이후 시위는 경산군과 성주군 등으로 이어지면서 유혈 충돌이 확대됐고 영천에서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선산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씨가 주도해 2천여 명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공격해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 간판을 달고 부호들의 가산을 빼앗아 나눠줬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 제주4.3과 여순사건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10월 항쟁은 '대구 10.1사건', '대구 폭동사건'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대통령 직속 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뀌면서 실상을 밝히지 못한 채 2010년 조사는 끝났고 과거사위원회는 해체됐다. 유족들은 10월 항쟁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로 인해 한국전쟁에서 학살된 분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태그:#10월항쟁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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