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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마을(용부원4리)

중앙고속도로에서 내려다본 양지마을 전경
▲ 양지마을(용부원4리) 중앙고속도로에서 내려다본 양지마을 전경
ⓒ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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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부원리 주막터'를 지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죽령역으로 올라갔다. 죽령역은 '주막터'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양지마을에 있었다. '주막터'에서 좌측 소로를 따라 400여 미터를 올라가면 5번국도가 나오는데 이 국도를 횡단하여 중앙고속도로 교각 밑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죽령역 마을인 양지마을이 나온다.

죽령역은 이곳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다. 만남과 헤어짐과 사랑과 미움이 교차했던 간이역으로서 50년대 이후의 죽령의 역사를 간직해온 곳이다.

풍기에서 자란 나는 기차를 타지 않고 죽령역에 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역마을로 올라갔다. 지명처럼 양지바른 마을이었다. 마을 중앙으로 나 있는 S자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어렴풋이 눈에 익은 풍경이 들어온다.

먼저 일제강점기에 지은 4동의 일본식 관사가 보이고, 몇 발자국 더 가니 '죽령역' 역사와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는 산뜻한 파랑색으로 새롭게 단장됐고, 역 마당 중간의 화단에는 오래된 전나무와 향나무가 옛 향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서 있었다. 오래 전에 봤던 주막과 점포는 없어졌다. 40년 만에 와 본 역 마당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역 마당엔 사전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이곳 이장님도 나와 있었다.

역마당 전경
▲ 죽령역 역마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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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은 역 마당 바로 옆에 살고 있는 박호선(47년생)씨다. 이장님은 철도청에서 40여년 간 근무했으며 이곳 죽령역에서도 10여년간 근무했었다고 한다.

이장님은 죽령역 역사에 대해, '죽령역은 1942·4·1일 보통역으로 시작하여 간이역이 되었고 2010·12·1일 부로 무임역이 되었다고 한다. 죽령역은 1970년대에는 한때, 역 직원이 10여명, 대한통운의 직원이 20여 명이나 들락거리던 역이었다고 한다.

또 1960~70년대 한창 번성했던 시기의 죽령역은 한번에 100여 명의 승객이 타고 내렸다고 한다. 용부원리뿐만 아니라 장림리와 사인암 일대의 주민들이 전부 이곳으로 와서 기차를 탔다고 한다.

당시의 역 풍경에 대해 '술집 이발소 식료품점 여인숙 세탁소 등이 있었으며, 술집만 해도 네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또 역 광장 옆의 부지는 상당부분 목재 하치장으로 사용됐는데, 목재가 꽉 들어차 하늘이 잘 안보였을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이곳에는 죽령역 서쪽 600여 미터 지점에 그 유명한 '또아리굴'(대강터널)이 있다. 단양역에서 죽령역으로 오기 위해서는 2㎞의 굴을 또아리처럼 360° 회전하면서 표고 40여 미터를 더 올라와야 이 죽령역에 다다를 수 있다.

이장님은 이곳 주민들이 잊지 못할 사건 하나가 있다며 들려줬다.

"1968년 3월 26일의 사건이었어요. 희방사역에서 출발하여 죽령으로 오던 화물열차가 연결기 고장으로 화차 25량이 '또아리굴' 바로 앞에서 탈선했습니다. 이 화차는 2.3㎞의 험준한 비탈길 선로를 기관사도 없이 마구 달리다가 화차 17량이 전복되었어요. 그 바람에 황소 51마리가 죽고 소 장수도 사망했지요. 이 때문에 이곳 주민들 모두가 한 동안 포식(?)을 한 적이 있었어요."

'대강터널 사건'의 기록

역 앞에 일제강점기 때의 관사 4동이 남아 있다.
▲ 죽령역 관사 역 앞에 일제강점기 때의 관사 4동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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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터널이 있는 선로의 서쪽 끝을 바라보며 360여명의 사상자를 낸 또 다른 엄청난 '대강터널 사건'의 기록을 떠올려냈다. 1949년 8월 18일, 이날 대강터널에서는 48명이 사망하고 309명이 부상을 입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한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건 사고였다.

1949년 8월 21일자 <경향신문> 박흥섭 특파원은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한다.

18일 오전 6시, 객차 6량을 단 서울발 안동행 505열차는 380여명의 승객을 태우고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6시경 단양역을 지나 이곳 대강터널(길이/2㎞)에 도착했다.

이 터널은 험한 산악지대의 경사도 높은 또아리굴이었다. 이 열차가 터널 속 500여 미터를 통과할 즈음에 돌연 급정차 되는 원인 모를 사고가 발생했다.... 그후 이 열차는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30여 분간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다. 그때 이미 터널 속과 객차 안은 증기기관차에서 발생된 석탄가스로 가득 찼다.... 승객들은 숨이 막혀 아우성이었고, 터널 속은 암흑의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순간, 열차 후부의 객차 3량이 쾅 소리를 내며 연결기가 끊어진다. 이 바람에 차량3량은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자 차장 왕영식은 분리된 객차안의 승객들에게 기관차편에 달린 객차 안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쳤다.

열차를 급히 터널 밖으로 끌어낼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암흑 속에서 일어났기에 혼란만 가중됐다. 그리고 이미 40여분 동안이나 석탄가스를 흡입하여 승객들은 모두 혼수상태였다. 정신을 차린 승객들은 차에서 내리자 거의 다 쓰러졌고, 부녀들과 어린이들은 이미 객차 안에서 실신됐다. 다시 일어난 승객들은 쓰러진 사람을 짓밟고 나오면서 기절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암흑의 수라장이었다.

한편 승객을 구하려던 차장과 기관차를 끌고 나오려던 기관사도 같은 순간 터널 속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터널은 무덤으로 변했다.

마침 이 터널을 수비하던 간수 이씨가 이 참변을 발견하자 단양역에 연락하여 구조차가 도착했다. 이때가 밤9시다. 사고발생 3시간 후였다. 이 구조차에는 단양 전기공사 직원과 '당지대한 청년단' 등 100여명의 구조대가 있었다. 현장에는 부슬비 내리고 있었고 경찰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터널 속으로 들어가 모터카로 총 290명을 구출했다. 그리고 객차 속에서 기절된 승객 30명까지 전부를 구출한 시간은 새벽4시, 이렇게 해서 장장 7시간의 구출작업이 모두 끝났다. 

당시 처참했던 광경을 그려본다. 많은 사상자들이 모터카에 실려 나오고, 간혹 살아남은 사람들은 긴 암흑의 터널에서 아우성치다가 터널 입구로 기어 나온다. 터널 안은 타이타닉호의 한 장면처럼 아비규환이다. 아우성치다가 석탄 연소가스에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남편을, 엄마 아빠를, 그리고 자식을 부르며 그렇게 죽어간다.

철길 넘어의 양지마을 전경이다.
▲ 양지마을 철길 넘어의 양지마을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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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온다. 구조된 승객 중 의식을 잃은 승객 46명은(1949,08,21/경향신문)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사망자는 안동철도병원과 도립병원에 안치되었고, 부상자들은 주변 병원에 분산 입원 치료했다.

그후 2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하여 총 사망자 수는 48명으로 늘어났다. 며칠 후 <동아일보>는 '총 51명이 사망하고 36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전한다.

★ 또아리굴(대강터널/2㎞) : 원형의 굴을 파서 360° 회전하며 표고 40미터를 하강하거나 상승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곳을 '따베이굴'이라고 불렀다.


태그:#죽령역, #양지마을, #용부원4리, #대강터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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