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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1일자에 '만석공원 영화정 개방할 수 없나?'란 기사를 작성한 적이 있었다. 기사에서 영화정을 개방할 것과 영화정 소개 안내판의 오류를 지적했었다. 이후 화성성역의궤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만석거가 현재의 만석공원으로 개발되는 과정 그리고 영화정이 다른 위치에 잘못 복원된 과정을 조사하게 되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전 영화정터와 영화정 복원장소를 답사해보니 영화정을 소개하는 안내 간판의 오류가 수정되어 있었다. 또 수원화성의 다른 안내판처럼 배경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가 찍혀 4개 국어 설명으로 말끔히 정비되어 있었다. 신속한 해결에 박수를 보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에 4개국어로 설명되어있다.
▲ 새로 교체된 영화정 안내간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에 4개국어로 설명되어있다.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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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迎華亭)은 1795년에 만석거(萬石渠) 축조 후 남쪽 언덕인 현재의 수원미술전시관 앞에 지어져 맑고 깨끗한 물을 내려다보고 기름진 대유평(大有坪)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현재 이곳에 가면 '영화정지(迎華亭址)'란 안내판과 그 옆에 '구영화정지'란 비석만이 쓸쓸히 옛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영화정지' 안내판의 내용이 가관이다.

"이 곳은 정조 19년 병진년(1796)에 중건된 건물인 영화정이 위치하였던 곳이다. 만석거는 정조 18년 을미년(1795년)에 조성된 저수지이나, 홍수로 둑이 무너지면 1번 국도와 경부선이 붕괴될 위험이 있으므로 일제 말기에 현재의 제방둑을 기공하여 해방 후 완성되었다. 그후 만석거는 논으로 변하였던 것을 현재 공원으로 개발하여 주차장 및 휴게시설로 구획되었다. 영화정 복원은 현재의 주변환경과 어울리지 않아 이곳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200M 지점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조 20년 병진년(1796), 정조 19년 을미년(1795)으로 정정되어야 하고, 나머지 설명은 해괴한 논리와 개발을 합리화하는 듯해 관련 내용을 삭제하거나 간판 자체를 철거하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영화정 개방에 대한 제안

처음 지어졌을때는 북쪽을 바라보는곳이다.
▲ 영화정 처음 지어졌을때는 북쪽을 바라보는곳이다.
ⓒ 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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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이 신구관 부사와 유수들이 관인을 인수인계하고 업무를 시작한 곳으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조가 만석거를 축조하고 대유평을 개척한 실천적 애민사상을 기릴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유평은 아파트 단지로 변하고 대유평을 관리하던 대유둔사도 없어졌으니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릴 공간으로 영화정이 제격인 것이다.

영화정을 개방하고 영화정 내에 다음과 같은 콘텐츠를 채우면 어떨지?

첫째, 대유평 관련 사진이나 대유둔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전시하고,
둘째, 인수인계했던 관인이나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셋째, 채제공의 시와 정조의 시 등 관련 시를 수집해서 전시하고,
넷째, 화성16경 중 대유농가(大有農歌), 석거황운(石渠黃雲), 하정범익(荷汀泛鷁)에 대한 것을 전시하면 작은 영화정이 차고도 넘칠 정도일 것이다.

수원박물관이나 화성박물관에서 영화정 특별 전시회를 기획해서 관련 자료를 모아 일반에 공개한 후 영화정에 상설 전시한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 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화정, #만석거, #만석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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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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