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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폭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습도는 높고 푹푹 찐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이 쉬이 물러가기가 싫은가 보다. 마지막 기승이라도 부리듯이! 그러나 입추가 지나고부터 여름은 노루꼬리만큼씩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입추가 지난 농촌 들녘. 나락모가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입추가 지난 농촌 들녘. 나락모가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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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풀밭에선 풀벌레소리가 들린다. 귀뚜라미, 여치, 쓰르라미…, 가을 전령사들의 목소리다. 심한 가뭄을 견딘 들판에도 몇 차례 장맛비를 맞더니 벼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어느새 나락모가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청아한 풀벌레소리가 바람결에 모아져 잠든 들판을 깨우기라도 하는 걸까? 모진 어려움을 버티고서 결실을 위해 키워온 벼이삭들이 고개를 쳐드는 일은 풀벌레소리와 조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제 스스로를 알리고, 또 자라는 이치가 놀라울 뿐이다.

산들바람 속의 농촌 들녘

휴일, 아내는 일주일치 피로를 풀 심사인가. 낮잠이 길어진다. 살랑살랑 선풍기 바람을 벗 삼아 쿨쿨 비몽사몽이다.

여름 낮잠은 잠깐이어야지 너무 오래 자면 머리가 무겁다.

"여보, 들판바람이나 쐬고, 어디 가서 맛있는 거나 먹고 오자!"

내 깨우는 소리에 아내는 잠결에도 기다렸다는 듯, "잠이 보약인데, 어딜 요?"라며 금세 말을 받는다. 그리고선 말과는 달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개운한 차림으로 우린 차 시동을 걸고 길을 나선다.

"오늘은 외포리 지나 황청리 그리고 창후리까지다."
"당신 또 돈대 탐방하려는구나."
"돈대에 가면 마음도 편하고, 우리 조상들 숨결도 느끼고! 얼마나 좋아?"
"그럼 오늘은 황청리 계룡돈대까지 가보면 어떨까요?"
"당신이 어떻게 해안가 벌판에 있는 계룡돈대를 다 알지?"
"나도 그 곳은 가봤다구요! 아는 분이 근처에 살아 몇 번 들렸죠."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드넓은 들판길이 시원하다. 녹색의 벼논은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한들한들 춤을 춘다. 흔들거리는 사이로 나락모가지가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었다.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한 작은 변화가 소리 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른 벼는 벼꽃이 확연히 드러나 색깔부터가 다르다.

키다리 수수밭을 지키는 노부부

들판에는 벼 색깔이 달라지는 것 말고도, 논두렁에 심은 수수도 모가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풍요로움이 있는 수수밭. 농부의 땀의 수고가 느껴진다.
 풍요로움이 있는 수수밭. 농부의 땀의 수고가 느껴진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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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길을 달리다 어느 마을에 입구에 들어섰다. 길가에 열병사열이라도 받으려는 듯 일렬로 뻗은 키다리 수수대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고개를 곧추 세운 수수모가지가 소담스럽다.

수수대가 있는 마을로 들어서며 아내가 뭔가를 발견한 듯 슬그머니 차를 멈춘다.

수수밭에서 새떼를 쫓고 계시는 할머니.
 수수밭에서 새떼를 쫓고 계시는 할머니.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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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저 수수밭 좀 봐요! 수수모가지가 멋지게 올라왔어! 그리고 말이야, 저 할머니 좀 봐? 줄을 당겨서 새를 쫒고 계셔!"
"어? 정말 그러네! 신기해!"


수숫대 군데군데 매달린 빈 깡통들. 줄을 당기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새떼가 도망간다.
 수숫대 군데군데 매달린 빈 깡통들. 줄을 당기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나고, 그 소리에 새떼가 도망간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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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에서 새떼를 쫒기 위해 메단 줄. 생각의 발상이 새롭다.
 수수밭에서 새떼를 쫒기 위해 메단 줄. 생각의 발상이 새롭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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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모가지 밑으로 길게 줄을 붙잡아매고, 줄 중간 중간에 알루미늄 빈 깡통을 서너 개씩 메달아 놓았다. 할머니께서 편안히 의자에 앉아서 늘어뜨린 줄을 힘 있게 잡아끌면 빈 깡통들이 부딪쳐 소리가 나고, 수수모가지가 흔들리게 되어있다.

줄을 당기자 "딸랑딸랑" 그리고 "훠이! 훠이!" 할머니 외치시는 소리와 함께 새떼들이 혼비백산 내뺀다. 참새 녀석들이 못된 수작을 부리다 깜작 놀라 줄행랑치는 모습이 우습다.

우리는 할머니의 특이하고 재미있는 새떼와의 전쟁을 유심히 바라본다. 차에서 내렸다.

"할머니, 참 재미있어요!"
"내 새 쫓는 거 봤남?"


할머니는 우리가 다가가 말을 건네자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 얼마 신나는 일이냐며, 얼굴 가득 웃음이시다.

"요 새떼들 말이야, 그냥 놔두면 수수를 죄다 절단을 내지!"
"그렇게 많이 쪼아 먹어요?"
"그럼, 지금 막 수수모가지가 뜸물 앉힐 때, 냠냠하면 남아나지가 않아!"
"다른 데는 양파자루를 뒤집어씌우던데요."
"이 많은 수수모가지에 무슨 수로 씌워! 할 수 없이 우리 영감님이 생각해 낸 게 요거야."


탐스럽게 모가지가 올라온 수수밭.
 탐스럽게 모가지가 올라온 수수밭.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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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농심의 지혜시다. 빈 깡통을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줄에 달아매고, 어떻게 그것을 수숫대와 엮어낼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께서 사다리를 이용하여 키 큰 수숫대 줄 묶는 것을 마저 끝내고, 우리 곁으로 오셨다.

"우리 생각 어때? 이렇게 수수밭 지키는 거, 아마 대한민국에서 우리뿐일 걸! 젊은이들, 그렇지 않아?"

우리는 입을 모아 "네!"하고 대답했다. 노부부의 일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인다. 80을 넘기신 두 분은 심신이 아주 건강해보였다. 아름다운 노년을 보는 것 같다.

수수에 대한 추억

할아버지께서 예전에 수수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그렇다. 수수는 쌀이 귀하던 시절 훌륭한 식량이었다. 잡곡으로 밥에 넣어먹기도 하고, 특히 팥소를 넣어 만든 수수부꾸미는 달짝지근한 맛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지만 수수를 털어낸 수숫대로는 빗자루를 만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긴 수숫대를 엮어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남는 것은 땔감으로 썼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가 내게 묻는다.

"수수깡 가지고 놀던 일 생각나나?"
"수수줄기, 수수깡요? 아! 수수깡안경이 있었어요!"


수수깡안경을 생각해내자 할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추억으로 즐거워하신다. 예전 마땅한 장남감이 없던 시절, 수숫대는 장난감재료로 훌륭했다. 수숫대껍질을 벗겨 가벼운 속과 껍질로 알 없는 안경을 쓰고 폼을 잡았다. 또 수수깡으로 바람개비, 지게, 모자 등 여러 가지 손장남감을 만들면서 놀았다. 수수대껍질을 벗길 때는 손을 베인 적도 있다.

수수밭의 여유로움.
 수수밭의 여유로움.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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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말동무가 되어주고, 예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인사를 건넨다.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히 잘 계세요? 가을걷이 끝나고, 수수방아 찧을 때쯤, 저희 수수 사러 올게요!"

꼭 다시 놀러오라며 두 분께서 차에 오르는 우리에게 손을 흔드신다. 그리고 아까처럼 줄을 잡아당긴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소리와 함께 수숫대가 당긴 줄에 의해 출렁거린다. 두 분 미소가 바람결에 실린다. 산들바람은 이미 가을이다.


태그:#수수, #수수밭, #수수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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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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