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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약탈의 역사'와 '반환의 논쟁사'를 엮은 문제작이다.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영국과 미국 언론이 선정한 '100인의 지식인' 타이틀을 갖고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다. 뛰어난 비평가이자 탁월한 논쟁가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지난 2세기 동안 그리스 본국 반환론과 영국 대영박물관 보존론 사이에서 조각난 삶을 살아온 파르테논 마블스(대리석)의 '운명'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어 전개되었는지 날카롭게 파헤친다.

파르테논은 2500년 민주주의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페리클레스와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에 의해 건설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다. 영국 파르테논 조각 환수 위원회 설립자이자 런던대학교 교수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파르테논을 "페리클레스 세대에게는 세상을 대하는 자신감과 확신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한 징표와 전형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현재와 미래의 영감을 줄 것"(43쪽)으로 평가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파르테논은 유일하고 찬란한 사회에 대한 기념물로 영원히 남게 될 터였다(43쪽)"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파르테논의 역사는 고난의 과정 그 자체였다. (비록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파르테논은 3세기경 대화재로 내부 일부가 손상되었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출발했지만 기독교 전파 이래 아테네 시민들의 뜻과 무관하게 이교도 성지, 교회 등으로 바뀌는 기구한 여정을 거쳐왔다. 1458년 투르크 점령 뒤에는 이슬람 사원을 거쳐 화약 무기고로 쓰였다. 20세기에는 히틀러의 '신질서'를 상징하는 만(卍)자 깃발이 내걸리는 '신성모독'을 당하기도 했다.

파르테논의 '진정한' 수난은 영국 외교관 엘긴(Elgin) 경이 그리스 주재 영국 대사에 임명되는 오스만제국(1299~1922) 말기(1799년)에 이르면서 본격화한다. 저자는 엘긴 경이 당시의 정치․외교적 상황을 적절히 활용해 오스만 당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뒤 파르테논에 접근했다고 보았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부패한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고 대사라는 신분을 남용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엘긴 경은 기계공과 석공들을 고용해 파르테논의 대리석 조각판들을 잘라 영국으로 가져갔다. "현존하는 파르테논 조각 가운데 절반 가량이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84쪽)을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다. 저자는 애초 엘긴 경이 그 대리석 조각판들을 스코틀랜드에 있는 자신의 집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려고 했다고 보았다. 훗날 파르테논 마블스의 그리스 반환에 반대하는 이들이 강조하는, 고대 예술 연구와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엘긴 경의 '명분'이 허구였다는 것이다.

엘'긴은 원정이 막바지로 접어들 즈음 아크로폴리스에서 최고의 작품을 엄청나게 그러모았다. 엘긴이 어떤 동기에서 그렇게 했든 그의 노력 덕분에 건축물과 조각이 개선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가 발견했을 당시보다 그 건축물과 조각의 상태가 나아졌는지를. 건축물의 측면에서, 엔터블러처(entablature; 처마돌림 돌출장식, 건물의 윗부분에 그림이나 조각으로 처리한 띠 모양의 장식, 기둥머리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기자 주)를 마구잡이로 잘라냈으니 답은 '아니오'가 되어야 할 것이다.'(112쪽)

파르테논 마블스의 반환 논쟁은 엘긴 경이 재정 위기로 조각상을 영국 정부에 판 직후부터 시작되어 200년간 이어졌다. 저자에 따르면 파르테논 조각 반환 반대론자들의 논거는 크게 다섯 가지다.

▲ 조각들을 떼어내 영국으로 가져간 것은 예술과 고전학 연구에 크나큰 축복이었음 ▲ 아테네가 아니라 런던에 있었기에 온전했음 ▲ 아테네보다 런던에 있어야 더 안전함 ▲ 엘긴 경은 문화재를 보전하겠다는 심정에서 조각을 떼어냈음 ▲ 조각의 반환은 주요 박물관과 컬렉션을 절멸하는 선례로 남을 것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논리적 근거들을 통해 이 주장들을 날카롭게 반박한다. 반환 반대론자들의 두 번째 논거인 '온전성' 주장에 대해 저자는 "아테네보다 런던에 포탄이 훨씬 더 많이 떨어졌다는 사실"(25쪽)을 환기한다.

'안전성' 주장에 대해서는 기원전 1400년대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오벨리스크인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나일 강가에 서 있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 체류했을 뿐인 템스 강가에서 더 많이 풍화작용을 겪"(207쪽)은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스가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마블스를 맞아들일 준비를 착실히 해온 결과물인 뉴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의 사례도 든다.

마지막 논거인 '절멸의 선례에 대한 우려'에 대한 논박은, 199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 네이딘 고디머의 말을 통해 살펴보자. 그는 대영박물관의 조각상들을 돌려주고 나면 박물관의 다른 외국 보물들도 모조리 돌려줘야 한다는 대이동으로 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세계 곳곳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심오한 예술적 표현력과 그 가치를 지향한다는 박물관들의 존립 목적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으로 보인다. 인류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저마다의 예술을 발전시켜왔다. 박물관이 텅 비고 말 것이라는 지나친 비약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는 각자 다른 문화 속에서 꽃피는 서로 다른 예술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해당 예술품이 창조된 문화적 배경을 훼손하지 않고서 합법적으로 외국 박물관에 옮겼던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7, 8쪽)

문화재 '약탈' 문제는 대영박물관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19세기 말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역사는 문명을 창조했지만 침략자는 문화재를 약탈했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의 많은 전시실이 제국주의 시절 힘의 논리를 앞세운 영국과 프랑스가 약탈해 간 피식민 국가들의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로 근대를 맞은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운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9월 1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안홍준 의원(마산회원구)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통해 밝힌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외문화재가 20개국 16만 342점에 이른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전체 국외문화재 중 42.2퍼센트에 해당하는 6만 7708점은 일본에, 27.7퍼센트를 차지하는 4만 4365점은 미국에 소재한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등 정치․사회적 격변기에 빠져나간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반출'이지만 '약탈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들 문화재의 남은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까.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반환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크리스토퍼 히친스 외 지음, 김영배․안희정 옮김 / 시대의창 / 2015.10.15. / 294쪽 / 1,6800원)

덧붙이는 글 | 정은균 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렸습니다.



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 - 약탈로 만들어진 대영박물관의 엘긴 마블스, 그 뻔뻔한 역사

크리스토퍼 히친스 외 지음, 김영배 외 옮김, 시대의창(2015)


태그:#<파르테논 마블스: 조각난 문화유산>,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국외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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