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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평전> 책표지.
 <강우규 평전> 책표지.
ⓒ 책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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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신임 총독을 맞이하는 남대문역(오늘날 서울역)과 그 일대의 분위기는 매우 살벌했다. 몇 달 전에 일어난 3·1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데다가, 새로 부임하는 재등실(사이토 마코토, 제3대와 제5대 총독)을 경호하고자 역 주변은 물론 남산 중턱의 조선총독부 청사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경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귀족들을 포함한 일본의 인사들과 외교사절들과 신문기자 등 신임총독을 맞이하고자 모여든 인파는 1천여 명. 일본군이 신임총독을 맞이하고자 도열병으로 동원한 병력만 의장대 1개 중대와 보병 2개 대대. 그런데 이처럼 삼엄한 경비가 무색하게 폭탄이 날아들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열차에서 내려 자신을 맞이하고자 나와 있던 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신임총독 재등실이 탄 마차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총독이 탄 마차를 향해, 누가 봐도 총독을 노린 폭탄이 날아든 것이다.

폭탄은 사진을 찍고 있던 기자 바로 옆에서 폭발, 무라다 육군 소장과 혼마치 경찰서장, 구보 만주철도 이사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사상자(사망 3명)를 내며 남대문역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만다. 아쉽게도 총독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으나, 그날의 의거는 3·1운동을 빌미로 조선인들을 더욱 압박하던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불씨가 된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독립투사 왈우 강우규(1855년~1920, 11월 29일).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의열 투쟁인 남대문역 폭탄사건, 그 간략이다. 

"너 나 죽는다고 조금도 어찌하지 말라. 만일 네가 내가 사형 받는 것을 싫어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면 나의 자식이 아니다. 내가 평생에 세상에 너무 한 일이 없음이 오히려 부끄럽다. 내가 이때까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 청년 교육이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아무리 애를 쓴대야 내가 죽느니만 같지 못할 것 같다. 즉, 내가 이번에 죽으면 내가 살아서 가르치는 것보다 나 죽은 것이 조선 청년의 가슴에 적게나마 무슨 이상한 느낌을 줄 것 같으면 그 느낌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이제 내가 이만큼 애쓰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조선 청년의 가슴에 인상만 박힌다면 그만이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가슴에 한 되는 것은 나 죽은 후에 조선 청년들의 교육이다. 지금은 조선 사람 가운데 매우 사람 같은 사람이 많아서 청년의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겠지만, 그저 그래도 눈을 감고 앉았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고 하는 십삼도에 널려 있는 조선 청년들이 보고 싶다. 아! 보고 싶다. 일러주고 싶다." - <강우규 평전>, 강우규 의사 의거 당시의 모 언론 기록 중에서.

강우규 의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거사 이듬해인 11월 29일에 순국하는데, 사형이 확정된 후 옥바라지 하던 아들 중건이 슬퍼하자 이처럼 말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범인 검거에 실패한 일본 경찰은 서둘러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범인 검거에 나섰지만 보름이 되도록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고 한다. 이런 일본 경찰의 체면을 겨우 살려준 것은 일본인들보다 조선인들을 더 악랄하게 고문했다는 악질 친일 경찰의 대명사인 김태석.

강우규 의사는 거사 후 동지의 집에 숨어 다른 거사를 준비하던 중 체포됐다고 한다. 강우규 의사의 모습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과 일제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거의 주인공이 64세 호호백발이었기 때문이다.

옛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옛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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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평전>(책미래 펴냄)은 강우규 의사의 1919년 9월 2일의 남대문역 의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히 들려준다.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자,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의거를 일으킨 강우규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최초의 책이라고 한다.

책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탄생하도록 자극적인 계기를 안겨준 사람은 강우규"이다. 지난 여름 영화 <암살>을 통해 널리 알려진 김원봉, 일본 인사들과 친일파들의 암살과 조선을 핍박하는 본거지 건물들 폭파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한 것은 남대문역 거사가 일어난 그 몇 달 후인 12월.

김원봉과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에게 의사가 뜻한 것처럼 '나라를 구하겠다는 비장한 자극(어떤 이상한 느낌)'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항일 의열 투쟁의 서막을 연 한의사'이다.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남대문역 거사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 투쟁으로, 남대문역 의거나 강우규란 이름은 당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의술을 잘 아시니까 일 년에도 수천 원을 버시지만은 그 돈을 한 푼도 내게 주시지 아니하고 전부 학교에 기부하시면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나는 나 할 일이 있으니까" 하십니다. …사형선고가 되니까 내가 낙심할까 보아 일부러 웃으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등배이니라. 너, 조금도 애비 죽는다고 어찌 알지 말고, 아무쪼록 잘 살아가거라" 하시면서 울지도 못하게 하시옵니다. "내가 죽더라도 육체의 애비가 죽는 것이니까 영혼의 애비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하시면서 아무렇지도 않으십디다" - <강우규 평전>, '1920년 5월 4일자 한 언론에 실린 강의사 아들 강중건의 말' 중에서.

책을 통해 한 가정의 가장 또는 아버지로, 교육자이자 민족주의자로 만나게 된 강우규 의사도 매우 감동스럽다. 아니 존경스럽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의사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는데, 의술이 뛰어나 30대 초반에 이미 거금을 모았다고 한다. 의사의 아들 강중건의 증언에 의하면 의사가 의술로 1년에만 수천 원씩. 한의사로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을 모았는데,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증언처럼 모두 학교에 기부했다고 한다.    

한의학과 상업에 종사하던 한 노인이 어떻게 그와 같은 거사를 할 수 있었을까? 책은 뛰어난 의술로 손쉽게 많은 돈을 벌음으로써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던 강우규 의사가 개인의 안락에 머물지 않고 의열 투쟁의 불씨가 되기까지를, 한의사이자, 교육자이며, 민족운동가요, 독립 운동가였던 의사의 삶을 조명한다.

평전인 만큼 당시의 언론보도 내용이나 재판기록들을 많이 담았다. 그래서 대개의 평전들처럼 이 책도 좀 딱딱하고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총독들의 만행들을 1대부터 9대까지 순서적으로,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1920) 등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주요 정책 등을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어 일제강점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96년 전 일본을 향해 폭탄을 던진 그 현장인 옛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의 동상이 서 있다. 오늘도 옛 서울역 광장에는 저마다의 삶과 사연과 목적지를 품은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길을 갈 것이다. 아무리 바쁜 걸음이어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될 것 또는 사람들이 있다.

강우규 의사의 삶과 자칫 움츠려들고 있던 독립운동의 물꼬를 열어준 셈인 의사의 남대문역 폭탄 사건도 그중 하나다. 그래서 <강우규 평전> 이 책이, 저자와 출판사가 매우 고맙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강우규 평전> (은예린) | 책미래 | 2015-10-21 |16,000원



강우규 평전

은예린 지음, 책미래(2015)


태그:#강우규의사, #김원봉, #서울역(남대문역), #암살(영화),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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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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