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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 좋은가? 어떤 책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가? 당연 내용이 좋거나, 감동이 특별한 책일 것이다. 그런데 책표지나 제목 때문에 좋아하거나, 오래 기억하는 책들도 있다. 책제목이나 표지 글씨체 등, 책 자체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사는 책도 있다. 그림이 좋아서 내 몫으로 구입해 눈 쉬운 곳에 꽂아놓고 가끔 꺼내 보곤 하는 그런 동화책들도 있다.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책표지.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책표지.
ⓒ 이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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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이상미디어 펴냄)은 지난 30여 년간 자연다큐멘터리 50여 편(<곤충의 사랑>,<어미새의 사랑>, <황새>, <한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을 가다> 등)을 제작한 최삼규 피디가 쓴 책이다. 이번 책은 표지 때문에 특히 더 오래 기억할 그런 책이다.

가젤과 누, 얼룩말 등의 초식동물 무리가 자신들의 생명을 노리는 천적인지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자 두 마리 가까이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책표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들에게 늘 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연계를 말할 때 '적자생존(환경에 잘 적응하는 생물이 결국에는 살아남는다)'이란 말과 함께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것이다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세렝게티 초원에서 나는 또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을 발견한 것인데,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절대 사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치타나 사자 등 맹수들은 배가 부르면 절대 다른 동물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치타는 배가 부르면 몇날 며칠이고 쿨쿨 잠만 잤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말이다. 배부른 치타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을 짓고 긴 잠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그렇게 자고 있는 치타에 대해서는 가젤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단잠에 곤히 빠진 치타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딱 자기가 생존할 정도의 먹이만을 구하는 것.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은 딱 그 정도만의 살생, 육식 동물이 생존할 정도의 살생만을 허용하는 셈이다. 반면, 그 수많은 초식 동물은 딱 1마리만 육식동물에게 먹이로 희생됨으로써 무리 전체의 평온이 유지되는 것이다. 30퍼센트의 확률로 어렵사리 성공하는 사냥,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정해준 야생의 황금률일지도 모른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에서.

그런데 정말 그럴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즉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에게 늘 지고 사는 그런 세계라면 세렝게티 초원에는 오로지 육식동물들만 살게 될 것이다. 당연히 책표지와 같은 풍경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자연에는 갑질하는 강자도 없고, 그래서 당하는 약자도 없다.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균형 있게 생존해 나가는 '조화와 공존'이다"고. 

그런데 아쉽게도 일부 사람들은 자연계의 극히 일부분 또는 단편적인 시각에 불과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우리 삶에 적용, 누군가를 짓밟고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한다.

글을 읽으며 혹자들은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를 생각을 해본다. 치타와 사자의 사냥 성공률이 각각 30%나 10%인 것은, 자연계는 결코 강자만의 세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치타와 사자가 받아들여 더 이상의 진화를 포기한 덕분 아닐까?

우리 인간들도 치타나 사자 등처럼 자연계의 이와 같은 질서에 순응, 쓸데없는 축적이나 힘의 과시를 위한 진화를 그들처럼 포기했다면 슈퍼갑 같은 것도, 쓸모없는 전쟁 같은 것도 애초에 없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하이에나는 뒷다리가 짧고 앞다리가 껑충 길어 달리는 폼이 좀 이상해 보이고, 애니메이션에서도 종종 나쁜 동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초원의 야생동물 세계에서 꼭 존재해야만 하는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독수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동물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를 다 치워주기 때문에 병균이 밀림에 번식할 여지를 크게 줄여준다. 하이에나는 초식동물들이 새끼를 분만할 때 나는 피 냄새를 20킬로미터 밖에서도 맡고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코가 예민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하이에나는 시도 때도 없이 태어나는 초식동물의 개체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는 사자나 치타 등 육식 동물들의 새끼나 무리에서 쫓겨난 늙은 수사자를 사냥하기도 한다. 어쩌면 조물주는 하이에나에게 초식동물과 육식동물간의 개체수를 조절해서 균형을 맞추어 주는 중간자 역할을 맡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에서.

저자는 'MBC <PD 수첩>'의 열혈 피디로 방송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방송 횟수를 거듭해 갈수록 "일을 계속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살려면 무조건 쉬라"는 권고를 들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눈에 띈 게 '제작이 힘들다'는 이유로 부장의 책상 서랍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자연 다큐멘터리 기획안이었다.

"한국 TV 자연 다큐멘터리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로운 주제,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감성의 한국형 자연 다큐멘터리의 길을 열었다. 'BBC',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서구의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사들이 독점해 오던 아프리카 야생 동물 프로그램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한국 최초의 아프리카 야생 동물 프로그램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마할레 침팬지들의 경이로운 생태를 담은 <탕가니카의 침팬지>, 사자의 고정관념을 전복한 <라이온 퀸> 등 새롭고 신선한 감수성으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평과 찬사를 이끌어 냈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저자 프로필' 중에서.

30여 년 전, 최 피디가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작한 1980년대 초.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자연다큐멘터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제작은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다. 

봄에 잠깐 볼 수 있는 애호랑나비(북한산. 4월)는 진달래꽃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교미후 수컷이 암컷의 교미기 가까이에 분비물로 수태판을 만든다. 다른 수컷과의 교미를 방지하는 일종의 정조대라고. 암컷은 족두리풀 잎에 16~18개 가량의 알을 낳는데, 잎이 부실하면 적은 갯수의 알을 낳음으로써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한다.
 봄에 잠깐 볼 수 있는 애호랑나비(북한산. 4월)는 진달래꽃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교미후 수컷이 암컷의 교미기 가까이에 분비물로 수태판을 만든다. 다른 수컷과의 교미를 방지하는 일종의 정조대라고. 암컷은 족두리풀 잎에 16~18개 가량의 알을 낳는데, 잎이 부실하면 적은 갯수의 알을 낳음으로써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한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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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잘 아는 누가 '흰줄표범나비-수컷'이라고 알려줬다. 6월 중순 어느날 우리집 마당(고양시)에 며칠 찾아왔는데, 손을 내밀었더니 10분 가량 검지 손가락에 앉아 간지럽히며 미네랄을 섭취했다. 사람들의 성격이 제각각인 것처럼 나비들도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다른가보다. 어떤 나비는 가까이 가도 늘 도망가지 않고, 어떤 나비는 늘 도망가기 바쁜 것이 말이다.
 나비를 잘 아는 누가 '흰줄표범나비-수컷'이라고 알려줬다. 6월 중순 어느날 우리집 마당(고양시)에 며칠 찾아왔는데, 손을 내밀었더니 10분 가량 검지 손가락에 앉아 간지럽히며 미네랄을 섭취했다. 사람들의 성격이 제각각인 것처럼 나비들도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다른가보다. 어떤 나비는 가까이 가도 늘 도망가지 않고, 어떤 나비는 늘 도망가기 바쁜 것이 말이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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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냉이꽃에 앉은 모시나비(북한산. 6월 초) 모시나비는 교미 후 수컷이 암컷의 교미기 가까이 수태낭을 만든다. 다른 수컷과의 교미를 방지하는 일종의 정조대라고 한다.
 미나리냉이꽃에 앉은 모시나비(북한산. 6월 초) 모시나비는 교미 후 수컷이 암컷의 교미기 가까이 수태낭을 만든다. 다른 수컷과의 교미를 방지하는 일종의 정조대라고 한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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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모두 7장. 자신이 제작한 수많은 다큐멘터리 중 의미 있는 다큐 현장들을 7장에 나눠 자연다큐멘터리 제작 그 숨은 이야기와 우리가 TV로 봤던 자연계의 아름다운 질서, 생명의 경이로움을 날 것 그대로 들려준다.

저자에게는 '자연다큐멘터리 장인' 또는 '세렝게티 피디'라는 애칭까지 붙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간 자연 다큐멘터리들을 보며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음에도 기억의 한계로 잊었던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비들의 날개에는 동종의 나비들만 알아볼 수 있는 자외선을 방출하는 인자가 있어 암컷과 수컷은 멀리서도 이 자외선을 보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직선거리로 4km 정도 떨어져 있어도 보인다고 한다. 만약 어떤 수컷 나비가 남산 팔각정에 앉아 있다면 그 나비는 경복궁 뜨락의 꽃나무에 앉아서 자외선을 방출하는 다른 암컷 나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곤충은 각기 독특한 냄새를 내는 페로몬이라는 특수한 호르몬이 있어서 서로 같은 종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암컷이 수컷을 유인하는 역할도 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 암컷 나비를 발견한 수컷 나비는 쏜살같이 날아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암컷 나비가 기껏 날개를 저어 수컷 나비를 유인해 놓고는 수컷이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점점 '싫어한다'는 것이다. 수컷이 날아와 암컷 옆에 사뿐히 내려앉으면 본능적으로 수컷을 때어내려고 도망치는데 수컷은 뒤떨어질세라 열심히 쫒아간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에서.

머잖아 봄이다. 지난 가을에 싹을 틔워 겨울을 난 두해살이풀들의 얼어버린 잎들에 초록빛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 말이다. 봄인가 싶게 하루가 다르게 눈에 많이 띄는 나비가 올해는 좀 더 특별하게 보일 것 같다. 책을 통해 이 부분을 비롯한 나비의 생존 비밀을 흥미롭게 접한 덕분에 말이다.

암컷 나비는 왜 자신이 유혹한 수컷 나비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싫어하며 도망가는 걸까? 자신이 첫눈에 반해 배우자로 선택한 수컷 나비가 강한지 부실한지를 시험하는 거란다. 나비만 이럴까? 올 봄 나비와 새와 또 다른 생명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그리하여 아름다운 공존을 위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최삼규) | 이상미디어 | 2016-01-15 |16,000원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 동물의 세계에는 슈퍼갑이 없다

최삼규 지음, 이상미디어(2016)


태그:#자연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어미새의 사랑, #최삼규 피디, #세렝게티 초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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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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