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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진 달이 서서히 차오르고 그렇게 기운다. 대보름이 도망치듯 지나갔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사촌들의 이름을 먼저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 외치던 그런 대보름은 사라졌다. 오곡밥으로 배를 채우고, 부럼과 귀밝이술을 챙기며 한 해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던 대보름도 희미해진다. 이번 대보름은 뭐가 바빴는지 오곡밥은커녕 부럼도 제대로 못 깨물었다.

마을학교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 이번 대보름에는 쥐불놀이를 하게 해주마라고. 아이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옛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걸로 끝이지만, 아이들의 불신은 한을 품으면 미래의 세상이 암울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스케줄을 맞추다 보니 디데이는 대보름 이틀 후인 24일로 잡혔다.

사실 쥐불놀이보다는 '불 깡통 놀이'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쥐불놀이라는 것은 원래, 들판에 불을 놓아 논밭두렁의 잡초와 잔디를 태워 해충의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행해진 고유 풍속이다. 하지만 요즘 도시에서 어디 논밭두렁을 구경하기 쉬운가. 설령 근교에 존재한다 치더라도 남의 집 논밭두렁에 불을 놨다간 방화범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우선은 장소에 대한 신중한 고민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인근 소방서에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 쥐불놀이를 좀 할까 하는데요, 근처 천변에서요. 그게 혹시 불법인가요?" 물론 응급으로 전화해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한 건 아니니 걱정마시라. 이런 질문이 처음인 듯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당황해 하면서, "아…. 네…. 그게 소방법에는 걸리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이라는 자신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얼른 전화를 끊었다. 이로써 합법성을 부여받은 것이다.

'무모' '전능'... 그대 이름은 부모여라

아파트 쓰레기장을 뒤져 수거한 깡통에 송곡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연결하여 만든 쥐불놀이 깡통들
▲ 쥐불놀이 깡통 준비 완료 아파트 쓰레기장을 뒤져 수거한 깡통에 송곡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연결하여 만든 쥐불놀이 깡통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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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깡통에 직접 구멍을 뚫으며 쥐불놀이의 기대감에 가득차 있는 아이들.
▲ 쥐불놀이 깡통을 만드는 아이들 자신의 깡통에 직접 구멍을 뚫으며 쥐불놀이의 기대감에 가득차 있는 아이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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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일요일을 맞아 아파트 재활용 수거함을 돌며 적당한 깡통을 찾았다. 분유통에 생선 통조림, 과일통조림까지 한 마리 길냥이처럼 쓰레기장을 헤매는 내 자신에게서 부모의 냄새가 났다. 깡통에 구멍 뚫는 일은 아이들에게 넘겼다. 흥부 자식들처럼 머리를 맞대고 앉아 깡통에 구멍을 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약간 애처롭긴 했으나, 친구들은 해보지 못했을 경험에 대한 기대감으로 표정은 밝았다.

쥐불놀이 전날, 아이들에게 긴급공지를 내렸다. 장갑이나 겉옷을 태울 수 있으니, 허름한 옷이나 작아서 버릴 옷 등을 준비할 것. 어릴적, 옷 한 벌 얻어 입기 힘든 시절에 쥐불놀이 하고 나서 점퍼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대보름부터 다음 설날까지 원망과 훈계를 들었던 기억이다. 장갑 한쪽을 태우면, 나머지 한쪽도 버리고는 잃어버렸다 거짓말하고 눈물 쏙 빠지게 혼나던 기억도 난다.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대망의 그날이 왔다. 아이들과 함께 집 근처의 천변 다리 밑으로 향했다. 7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 아이까지 쥐불놀이라는 것을 해본 녀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깡통에 넣을 불을 지피고, 다른 한 쪽에서는 숙달된 조교의 안전 교육이 진행됐다. 아빠들 중 한 명이 그래도 시골에서 자란 경험이 있어 시범과 함께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영하의 날씨에 제법 바람이 불어서인지 불은 쉽게 지펴지지 않았다. 사실, 나도 도심에서만 자란지라 벌판에 모닥불지피기 같은 야생모드로의 전환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쥐불을 기다리는 초롱초롱한 여러 개의 눈망울을 외면할 길이 없었다. 단지 그대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론 무모해지고, 때론 전능해진다.

불이 타올랐다

이틀 지난 보름달이 저 멀리서 훤히 비추고 있다. 불 지피는데만 30여분 쯤 걸린듯하다.
▲ 쥐불을 놓기 위해 불을 펴는 아마 이틀 지난 보름달이 저 멀리서 훤히 비추고 있다. 불 지피는데만 30여분 쯤 걸린듯하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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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모닥불이 타올랐다. 아이들 깡통에 작은 불씨들이 옮겨지고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불놀이가 시작되는가 싶었다. 깡통의 구멍 사이로 불꽃이 튀며, 원형의 불자취가 도시의 불빛을 집어 삼키는 장관이 연출되기를 기대했다. 좀 더 큰 원을 그리려는 아이들의 바램과 새로운 놀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퍼져나갈 거라 예상했었다.

'아마(아빠엄마의 줄임말)! 불이 자꾸 떨어지는데요' '깡통 돌리는데 손가락이 너무 아파요' '무서워서 못 돌리겠어요' 등등. 여기저기서 불만과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몇 차례 시범을 보여줬지만, 불놀이가 낯선 아이들은 적응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예 깡통을 내던지고 냇물에 돌 던지고 노는 녀석도 있었다.

놀만한 소재가 부족했던 어린 시절, 나뭇가지와 버려진 각목들을 그러모아 간신히 불을 지피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불붙은 나무로 엑스칼리버를 흉내 내며 칼싸움을 벌이던 생각이 난다. 할머니 몰래 훔쳐 나온 고구마 몇 덩어리가 불속에서 적당히 익을 때까지 주린 배를 쥐어 잡고 놀던 때였다. 손이며 얼굴이며 숯검댕이가 돼 먹던 군고구마의 맛은 어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겨울 긴 밤을 그저 밖에서 놀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시절이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아이들이 변했다

쥐불놀이에 앞서 깡통 돌리는 방법과 주의사항들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아이들.
▲ 쥐불놀이 기본 교육 쥐불놀이에 앞서 깡통 돌리는 방법과 주의사항들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아이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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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불놀이를 난생처음 해보는 아이들. 오락과 스마트폰에 더 익숙해진 아이들. 터닝메카드에 열광하는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걸까. 하지만 아이들은 역시 아이들이었다. 조금씩 요령이 생기고, 추운 날씨에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큰 아이들 몇은 제법 여유를 부리며 깡통을 돌렸고, 작품 사진에서나 볼 수 있던 쥐불놀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중간 중간 언 손을 녹이기 위해 곁불을 쬐러 왔다가도, 다른 아이들의 멋진 불 돌리기를 보면 샘이 나서 다시 달려가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져갔다. 모닥불에 구워 줄 간식거리를 챙겨오지 못한 점이 사뭇 아쉬웠지만, 짧은 시간 준비해 나름의 추억을 만들어줬다는 점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쥐불놀이 체험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뒷정리를 했다. 어느 마을학교에서는 쓰고 난 깡통을 그대로 뒀다가 내년에 다시 사용하기도 한다는데, 불에 탄 깡통을 모아보니 조금은 흉물스러웠다. 쓰레기통을 뒤질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재활용 수거함으로 보내기로 했다. 민속놀이 체험만큼 중요한 것이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쥐불놀이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 누군가의 부모가 됐을 때, 그 아이들에게 쥐불놀이를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쥐불놀이를 책과 사진으로만 본 아이들과는 느끼는 감흥이 다를 것이다. 회전하는 불의 열기와 소리와 빛을 오감으로 느껴본 아이들의 가슴속에,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작은 불씨가 남기를 바랄 뿐이다.

쥐불놀이가 처음이라 깡통 돌리는 동작이 아직은 서툰 아이들.
▲ 도심 속 쥐불놀이 쥐불놀이가 처음이라 깡통 돌리는 동작이 아직은 서툰 아이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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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월대보름, #쥐불놀이, #전통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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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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