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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고통, 시간의 힘도 덜어내지 못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고통은 그대로입니다. 70년이 지나도 여전히요.
고통은 꿈에까지 따라옵니다. 고통에 의해 잠은 너덜너덜해지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것만이 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어 현실의 고통이 또다시 시작됩니다. 기억 때문입니다. "잊으려고 애써 봤지만 떠올릴수록 생생하기만" 한 기억. 70년이 흘렀는데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기억.

어린 수인의 꿈은 조선 명가수가 되는 거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심심찮게 한 곡조 뽑아 대는 것은 물론, 청소를 하면서도, 밥그릇을 닦으면서도, 뒷간에서 일을 보면서도 수인은 노래를 불렀어요. 흥 많고 왈가닥인 수인의 시끄러운 입은 아무도 막지 못했습니다. 수인과 죽이 딱 맞아 돌아가는 아빠가 뒤에 떡 버티고 있는 이상.

"아바디, 내레 가수가 되면 어떻캈시오?"

"아이구야, 내 딸이 고저 조선 팔도에서 가수로 이룸을 날린다문야 내레 갓 쓰고 훨훨 춤이라도 추갔어." - 본문 중에서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수인이 태어난 해는 1927년. 수인이 교실에서 한 곡조 뽑던 해는 1939년. 열여섯 수인이 군수 공장에 일을 하러 가는 줄 알고 배를 탄 해는 1942년. "상처 입은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누워 홀로 악몽을 꾸던 해는 2016년. 수인 할머니는 위안부였습니다.

소설 <푸른 늑대의 파수꾼>에는 두 개의 시간이 나옵니다. 어린 수인이 위안부에 끌려가기 전의 시간과 햇귀가 수인 할머니를 만난 시간. 1940년대와 2016년의 시간이 번갈아 이야기 되는데, 그 속에서 수인은 점점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햇귀는 그런 수인을 위해 달려갑니다.

2001년에 태어난 열여섯 살 햇귀는 봉사활동에서 수인 할머니를 처음 만납니다. 할머니는 일제시대 때 큰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어요. 그때 다친 허리 때문에 거동도 불편하답니다. 무슨 피해길래. 얼굴에 끔찍한 칼자국이 나 있는 할머니는 어느 날 허공에 대고 이렇게 묻습니다.

"내 인생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 본문중에서

할머니 인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할머니의 과거가 궁금해진 햇귀는 인터넷에서 할머니가 당했다는 피해가 무언지 검색합니다. 위안부라 치니 일본 군인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했던 젊은 여성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때의 일을 70년이 넘도록 잊지 못한 수인 할머니의 고통. 할머니 얼굴 "한쪽 귀에서 입까지 뺨을 두 동강 내듯 그어져 있는" 칼자국보다 더 끔찍한 상처가 할머니 안에서 불이 되어 할머니를 녹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파수꾼이 된 햇귀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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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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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햇귀가 할머니의 고통을 알게 되고, 후대에 태어난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수인 할머니를 위해 햇귀 자신이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본격적인 흐름을 맞습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었기에 그 고통의 기억 속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고통을 애초에 경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지 않을까요.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입니다.

이 책은 소설이기에 이걸 가능하게 했습니다. 할머니들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소설은 마법을 부립니다. 햇귀는 너무나 오래도록 할머니를 괴롭혀온 기억에서 할머니를 구해주기로 합니다. 기억 자체를 없애주려는 겁니다. 고통 자체를 겪지 않게 해주려는 거죠. 햇귀는 어린 수인이의 파수꾼이 되기로 합니다.

시간 여행입니다. 이제 햇귀의 목표는 1942년의 수인이 배를 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지 말라고 말하는 본인의 말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수인은 햇귀의 바람대로 배를 타지 않을까요. 

책의 제목 <푸른 늑대의 파수꾼>에 나오는 늑대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잔인한 이빨을 으르렁거리며 악이 무언지도, 악을 피하는 방법이 무언지도 모르는 선한 이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모든 것을요. 그리고 파수꾼은 '지키는 자'입니다. 늑대에 물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이들을 지키는 자.

저자 김은진은 이 책을 쓴 이유로 "할머니들을 지옥으로 몰고 간 제국주의, 현재까지도 흐르고 있는 제국주의의 시간에 제동을 걸고", 우리 모두 "과거 제국주의의 시간을 함께 기억하고 파수꾼이 되어 그 모든 늑대들로부터 순수한 인간성을 지키자" 말하고 싶어서였다고 합니다.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제국주의의 성난 이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켜드리자고요.

하지만 마법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우리는 할머니들을 햇귀처럼 지킬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의 이 현실에서 할머니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할머니들은 지금껏 일본 정부에 "사실을 밝히고 정당한 배상을 할 것, 책임자를 처벌할 것, 진심으로 사죄할 것,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바르게 교육할 것" 등을 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아직까지 이 요구들은 지켜지지 않았죠. 그저 굴욕적인 졸속 협상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파수꾼이 되어 할머니들을 지킬 방법은 이러한 할머니들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또 기억하고, 또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까지요.

덧붙이는 글 | <푸근 늑대의 파수꾼>(김은진/창비/2016년 04월 18일/1만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푸른 늑대의 파수꾼 - 제9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김은진 지음, 창비(2016)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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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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