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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병마용관
 서한병마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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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물관은 문묘를 활용해 만들어졌다

함양박물관은 함양 시내 위성구(渭城區) 구도심에 있다. 그래서 좁은 가로수길을 따라가야 만날 수 있다. 입구 대문이 솟을삼문이다. 가운데 문 위쪽에 문묘(文廟)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에는 함양박물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함양 문묘는 명나라 때인 1371년 건설되었고, 건물의 일부가 1962년 함양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곳에는 함양궁 출토유물관, 옥기정품전(玉器精品展), 서한병마용관(西漢兵馬俑館), 불교문물진열 등 6개의 전시실이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말을 매 두는 말뚝 또는 돌기둥인 전마장(拴馬桩)이다. 전마장은 대개 궁궐, 능묘, 절과 사당의 정문 양쪽에 세워두던 것인데, 지금은 이게 다 건물 정원으로 들어와 있다. 사가(私家)의 경우 전마장을 말뚝으로 만들지만, 사람과 말의 출입이 빈번한 큰 건물에서는 전마장이 옥, 대리석, 화강암 같은 돌로 만들어진다. 특히 말고삐를 묶는 상단부는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해 예술성을 부여했다.

안읍하관종
 안읍하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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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양궁 출토유물관으로 들어간다. 함양궁은 진나라 때 함양성의 정궁으로 이곳에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는 함양 주변에서 나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모양의 돌인 석고(石鼓)다. 이것은 북 모양의 석각 또는 비석으로 춘추시대부터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전서체의 한자로 시 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읽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안읍하관종(安邑下官鍾)은 술을 보관해 놓는 용기로 진나라 때 작품이다.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배가 부르고 목이 가는 항아리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쉽게 말하면 청동제 술항아리다. 이때 종은 부피의 단위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 외 취사용의 청동제 솥, 칼과 화살촉, 와당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슴문 와당이 대표적인데, 이것은 춘추시대의 것이다.

의비전과 명도전
 의비전과 명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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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사용하던 화폐인 금판(金版)과 동패(銅貝)가 있다. 금판에는 영원(郢爰), 진원(陳爰) 같은 명문이 있는데, 이것은 중량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동패는 은나라 이후 춘추전국시대까지 사용된 화폐로, 이곳에 있는 것은 그중 의비전(蟻鼻錢)이다. 의비전은 전국시대 사용된 화폐로, 문자 그대로 하면 개미코처럼 생긴 동전이다. 그런데 실제 모양은 찡그린 얼굴처럼 보인다. 그 옆에는 전국시대 사용된 명도전(明刀錢)도 있다.   

진나라 수도의 박물관답게 특이한 유물이 많다

매미 모양의 옥함(玉?)
 매미 모양의 옥함(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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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규(玉圭)
 옥규(玉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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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기정품전으로 들어가면 정말 특이한 물건들을 볼 수 있다. 이들 옥제품은 대부분 장사지낼 때 부장품으로 넣은 물건들이다. 이들 옥은 두 가지 용도로 쓰였다. 하나는 사자(死者)의 몸에 걸치는 장식품이었다. 팔찌, 목걸이, 머리 장식 등이 이에 속한다. 머리빗과 비녀 등도 보인다. 이들은 모두 조각이나 모양이 아름답고 정교해 예술성이 뛰어나다. 다른 하나는 순수 부장품으로, 사후의 안녕과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남을 기원하는 의미로 넣어졌다.

이들 부장품은 사람, 사자, 돼지, 매미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매미 형상의 옥을 함(唅)이라 부르는데, 장례시 그것을 사자의 입에 넣었다고 한다. 그것은 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옥 유물도 있다. 한나라 때 부장용 옥기(玉器)인 규(圭)인데, 끝이 뾰족한 직육면체가 사방팔방에서 가운데 원형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강산을 가운데로 끌어들여 동서남북 사방의 안정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중수함양현성비
 중수함양현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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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전시관은 서한 병마용관이다. 그런데 중간에서 우리는 중수함양현성비기(重修咸陽縣城碑記)라는 비석을 하나 만난다. 여기서 핵심은 함양현성이다. 그러나 함양현성의 원래 이름은 함양성이다.

함양성은 기원전 359년 진나라 효공(孝公)이 위수(渭水) 북쪽에 함양궁을 지으며 처음 만들어졌다. 그 후 함양이 현으로 격하되면서 함양현성이 만들어졌고 역사 속에서 퇴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43년부터 1748년까지 중수하고 1749년(건륭 14) 중수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진시황 병마용과 다른 서한 병마용

보병 도용: 소부(小部)
 보병 도용: 소부(小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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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함양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서한병마용관을 보러 간다. 서한병마용관에는 700여개의 병마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마용은 보병(步兵), 기병(騎兵), 수병(水兵), 거병(車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보병과 기병만 있다. 서한 병마용관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한 곳에는 출진을 준비하는 보병과 기병이 대열을 갖추고 서 있다. 다른 곳에는 이들 병마용을 개별적으로 전시하면서 그들이 갖는 특징을 글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나라 보병의 편제는 5인이 1오(伍)가 되고, 10인이 1십(什)이 된다. 10인 즉 1십이 10 모이면 100인이 되어 1둔(屯)을 형성한다. 100인을 이끄는 지휘관을 둔장(屯長)이라 부른다. 그리고 2개 둔이 모이면 1곡(曲)이 되고, 그 지휘관을 군후(軍侯)라 한다. 바로 이곳에 보병 도용이 200명(10줄×20명)으로 1곡을 이루고, 2곡이 있으므로 400명으로 1부(部)를 형성한다.

기마 도용
 기마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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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400명 보병으로 이루어지는 소부(小部)는 군사마(軍司馬)가 지휘하고, 여기에 기병이 포함되는 대부(大部)는 교위(校尉)가 지휘한다. 이곳 전시관에는 400명의 보명 외에 210명의 기병과 말로 이루어진 기마대가 또 있다. 이들 기마대는 10줄×7기마의 형태로 3개 부대가 편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부대는 대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병마용이 지금은 모두 유리벽에 갇혀 있다.

그리고 부의 상위 개념이 영(營)이다. 5개 부가 모여 1개 영이 되므로, 영의 보병수는 2000명이다. 영을 이끄는 지휘관을 우리는 장군(將軍)이라 부른다. 앞에서 언급한 위청과 곽거병은 대장군이므로 최소 1만 명 이상의 보병을 거느렸을 것이다. 기록에 보면 이들은 5만~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린 것으로 되어 있다.

기병 도용
 기병 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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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개별적인 병마용 전시관으로 가서 서한 병마용의 특징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병마용을 보려면 크게 다섯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머리 모양, 얼굴 생김새, 복식, 손발의 모양, 채색. 이들의 모양에 따라 병마용의 특징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보병과 기병을 따로 분리해서 상당한 간격을 두고 세워놓아 하나하나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들 병마용 역시 머리와 얼굴, 복식, 손과 발 등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 말의 모습도 다르다. 머리를 치켜들고 입을 벌린 것도 있고,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한 자세를 취한 말도 있다. 붉은 갈색으로 채색된 말도 있고, 색이 벗어져 흑회색을 띤 말도 있다. 사람보다는 말을 잘 만들어 기마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들 병사가 갑옷을 입은 경우가 거의 없다. 군사용이 아닌 의전용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교미술은 또 어떻고

명나라 때 석가모니불
 명나라 때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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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불교문물 진열실이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것은 청동으로 만든 석가모니불이다. 이 청동불상은 명나라 때 작품으로, 함양 북쪽으로 15㎞ 떨어진 북두진(北杜鎭) 복창사(福昌寺)에 있던 것이다. 1964년 이곳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부처님의 상호가 인간적이면서도 현대적이다. 예술성과 미학성도 떨어지는 편이다. 명나라 시대만 해도 유학이 숭상되고, 불교가 쇠퇴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석조보살상과 석조 불비상의 예술성과 미학성이 뛰어나 보인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온몸에 영락과 장식을 한 관음보살상은 후덕한 미소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 같다.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불비상은 많이 마모되어 원형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지만, 5방5불(五方五佛)이 조각되어 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5방불이 안치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밀교(密敎)와 관련이 있다.

석조 불비상
 석조 불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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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방불은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와 보생여래(寶生如來)가 협시하고 있고, 그 바깥을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와 부동여래(不動如來)가 호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불비상은 밀교가 들어온 당나라 현종 이후 작품이다. 얼굴이 길고 양감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아, 북위와 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청주박물관에 있는 비암사 불비상과 돌의 재질이나 조각수법이 상당히 다르다. 비암사 불비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청동불도 여럿 있다. 크기도 아주 다양하다. 수나라 때부터 명나라 때까지 작품이 있다. 이들 불상은 예술성과 미학성이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밀교 계열의 합체불상이다. 지혜를 상징하는 남성 에너지와 자비를 상징하는 여성 에너지의 결합을 통해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남녀간의 교합으로 보인다. 그래서 에로틱한 느낌을 준다.

밀교 계열의 합체불
 밀교 계열의 합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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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에는 힌두교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와 있다.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른손의 차크라는 비쉬누의 상징이고 왼손의 삼지창은 쉬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지혜와 미덕, 자비와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지만,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신비롭고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이곳에는 옥으로 만든 불상도 있다.

그리고 복도와 정원 한쪽에서 비석과 석조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유물은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지는지 거의 방치 수준이다. 비석들은 청나라 시대 것이 많이 보인다. 함양성서북계비(咸陽縣西北界碑)라는 글씨도 보인다. 그러나 석조물의 조각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사자, 용, 말, 기린 등을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신비감을 더했다.

석조 사자
 석조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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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고 난 우리는 함양박물관을 나와 서안으로 간다. 함양과 서안 사이에는 그 유명한 위수가 있다. 강에는 위성교(渭城橋)가 놓여 있다. 왕유의 시 '위성곡(渭城曲)'에 나오는 그 위성이다. 위수와 위성을 매개로 우리는 선인들과 생각을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술 한 잔 권하며 서역으로 보낼 친구가 없다. 단지 서역으로 법을 구하러 간 승려들의 흔적을 내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태그:#함양박물관, #서한병마용관, #옥기정품전, #불교문물진열, #안읍하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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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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