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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사회의 종착지에는 희망과 파멸 중 무엇이 있을까. 전북대 과학학과 심혜련 교수의 <20세기의 매체철학>에 따르면 전문가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은 미디어 전문가 10명의 사상을 정리했는데, 그 중 미디어 종말론자 폴 비릴리오는 '우리 완전히 망했다' 수준의 주장을 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정보혁명 이전 산업혁명, 전기 발달 시기부터 이미 운송수단과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사람과 정보의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멀거나 가까운 거리 개념은 점점 무의미해졌다. 그런데 그의 독특성은 이 현상을 '공간의 확장'이 아닌 '공간의 축소(소멸)'로 본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이곳저곳 쉽게 움직일 수 있으면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도. 왜일까? 그는 근대화와 함께 모든 교통로가 권력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했다는 걸 강조한다.

그래서 산업혁명을 질주혁명이라고까지 부른다. 속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는 지적이다. 속도를 장악한 자가 권력을 장악하는 자가 되므로 권력투쟁도 속도투쟁의 성격을 포함한다. 비릴리오의 생각을 오늘날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시켜 쉽게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무한경쟁 시대'를 외치며 시장 점유율을 높이고 생산·유통·소비의 효율성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늘 '좀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상황이니.

속도가 우리를 망하게 할 거라고?

<20세기의 매체철학>(심헤련 / 그린비 / 2012 / 2만3000원).
 <20세기의 매체철학>(심헤련 / 그린비 / 2012 / 2만3000원).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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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경쟁을 하는지는 잊고 결과만이 중요해지면 어떤 상황이 닥칠까. 책에서는 비릴리오의 열차의 비유를 소개한다. 열차의 출발지와 도착지만 중요해질 뿐 그 사이 '도정(道程)'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잠이 들면 어느새 도착지에 도달해 있는 순간 이동은 이제 놀랍지 않다. 그리고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의 삶의 공간, 지속과 머무름의 공간, 연대의 공간, 지역 사회도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최근 개봉한 영화 <부산행>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KTX 승객들이 좀비에 물려 감염되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룬 <부산행>은 펀드매니저 석우와 딸 수안이 등장한다. 석우는 수안을 부산에 있는 엄마에게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그런데 수안은 열차 출발 전 좀비가 승무원을 덮치는 광경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석우는 이미 잠이 들어있다. 좀비물 대부분이 그렇듯 <부산행>도 사회비판적이다.

그렇다고 이미 전국적인 좀비 감염이 시작된 이상 열차를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영화 <설국열차>와는 다르다. 그래서 비릴리오의 통찰은 늘 더 큰 파국의 위험이 도사리는 것도 모른 채 맥락,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태, 특히 서유럽보다 심한 압축 성장기를 거친 한국의 현실과 잘 매치된다. 영화의 관객들도 자꾸 세월호와 메르스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비릴리오의 통찰은 운송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책에 따르면 비릴리오는 정보혁명 이후 '실시간'이라는 새 시간 개념, 원격 통신 기술이 보급됐고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이 거의 무의미해졌다는 점도 지적한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먼 곳이 더는 먼 곳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시간으로 '지금'과 '여기'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됐다. 인간관계조차 구체적이지 않고 즉흥적인 SNS 친구 맺기가 됐다는 게 심혜련 교수의 보충 설명이다. 또한 비릴리오는 열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승객들이 창밖 풍경을 접할 때 구체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연속적인 이미지 다발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편입되지 못 한 이미지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 지각의 결손 현상을 '빈번한'을 뜻하는 그리스어 피크노스와 '발작'을 뜻하는 렙시의 합성어인 '피크노렙시(기억 부재증)'라고 부른다.

그는 피크노렙시가 이미지를 시각화해주는 장치와 통신 기술이 결합하는 인터넷에서 더 심각하다고 본다. 인간의 오감이 균형이 깨져 시각에만 쏠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편협한 관점을 가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지적이다. 이 통찰을 최근 이화여대 사태와 접목해 보자.

최근 이화여대 총장의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농성이 있었다. 학교 측은 이를 해산시키려는 목적으로 경찰 1600명 투입해 논란이 되었다. 그 와중에 3만1400여 명의 팔로워를 가진 페이스북 '폴리스 위키' 페이지에 한 이용자의 제보가 올라왔다. 지나가던 이화여대 학생들이 자신의 손등에 뜨거운 물을 붓고 도망갔다는 주장이었다. 운영자는 "증거자료 감사합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해당 제보는 100건 이상의 좋아요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조작된 제보였다. 해당 사진은 4년 전 강정 마을 구럼비 폭파 항의 시위 당시 다친 시민의 손이었다. 거짓 제보자가 올려 놓은 결과만을 지각한 일부 사람들은 맥락없이 왜곡된 지각에 빠졌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어떻게 '피크노렙시'에 빠질 위험이 있는지 잘 보여준다. 책에 소개된 비릴리오의 예언도 '맥락'에 대한 무시가 불러올 파국을 겨냥한다. 권력이 사람들을 '맥락맹'이 되게끔 부추기면 더 끔찍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소소한 모든 행위를 감시하며 탈맥락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권력을 행사한다면, 모두가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끔 부추긴다. 비릴리오의 생각이 맞을까? 분명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스마트폰 액정과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소소한 일상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는 거의 무의미해졌다.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일부 폐쇄성을 띠고 내집단끼리 주고받는 정보 외에는 믿지 않는 '불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비릴리오에게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희망의 빛은 찾을 수가 없어 섬뜩하다.

물론 <20세기의 매체철학>은 다른 관점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도 소개한다. 가령 그로스클라우스는 비릴리오와 달리 '아직' 사람들은 어쨌든 계속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므로 '공간의 소멸'까지 말할 수는 없다고 봤다.

한편 벤야민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감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콘텐츠에 주도권을 줄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재창작도 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클릭'을 하는 주체들이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식을 형성하고 있느냐가 문제로 남는 듯 보인다.


20세기의 매체철학 -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심혜련 지음, 그린비(2012)


태그:#부산행, #KTX, #좀비, #폴리스위키,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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