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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숙하여 아늑하고 고요하다고 할 적에 '그윽하다'라는 낱말을 써요. 깊이 들어가지 않거나 아늑하지 않거나 고요하지 않다면 '그윽할' 수 없어요. 깊지 않더라도 아늑하면서 고요하다면 포근할 수 있어요. 시끄러운 곳이라 하더라도 어버이가 아이를 아늑하면서 고요히 품거나 안아 준다면 이때에 아이는 포근하다고 느껴요. 하루를 마무리짓고 잠자리에 들어 아이를 새근새근 재운다면,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새롭게 그윽함을 느낄 만해요.

겉그림
 겉그림
ⓒ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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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골에서 아이들하고 달밤을 누리면서 살며시 마을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달빛을 느끼면서 아이들이 고이 잠을 자도록 이끈 뒤에 <그윽>(문학의전당, 2016)이라는 시집을 찬찬히 읽어 봅니다.

"햇살은 다, 이리로 소풍을 나왔는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물빛이 
가을빛을 닮아 맑고 깊다 
얕아서 소란스런 물도 껴안고 가다 보면 
고요해지는 것일까 
꼬여서 삐딱한 물고기도 품어 안으면 
푸른 지느러미 올곧게 출렁일까" (가을 호수)

"메기는 어항을 사랑했다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 지어 다니는 송사리떼도 
어항을 사랑했다 
먹이 앞에서는 서로 물고 뜯는 피라미도 
어항을 사랑했다" (어항)

시집 <그윽>은 시인 이정자 님이 붙인 이름처럼 그윽하게 삶에 깃든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만합니다. 수선스럽지 않고 왁자하지 않습니다. 북적이지 않고 시끌거리지 않습니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리도, 승강기 소리나 쇳소리도, 비행기나 헬리콥터 소리도 이 시집에는 깃들지 않아요. 자그마한 삶자리에서 자그맣게 피어나는 그윽한 이야기가 작은 시집에 머뭅니다.

"중앙탑 공원
민들레 소녀 조각상 손목에
토끼풀꽃 시계가 채워져 있다

이승을 돌아 돌아 만난 인연처럼
풀꽃 시계를 채워준 이는 누구일까"
(풀꽃 시계)

"어디에서 발원했을까 
맑은 물소리에 귀를 씻고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는 
고마리 꽃잎 이슬 한 방울에도 겸허해진다" (하늘재)

때로는 너른 마당에서 시 한 줄이 태어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수많은 외침을 갈무리하는 시 한 줄이 자라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주 고요한 곳에서 시 한 줄이 태어납니다. 아기를 낳는 어머니는 가장 그윽한 곳을 살펴 새로운 목숨을 받아내듯이, 더없이 고요한 자리에서 그윽한 이야기가 시 한 줄로 자라납니다.

아이들은 여러 동무하고 마음껏 깔깔거리며 뛰놀곤 해요. 아이들은 아주 조용하거나 고요한 곳에서 깊이 꿈을 꾸며 잠들어요. 아이들은 쉴새없이 노래하면서 뛰놀아요. 이러다가도 모든 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꾸벅꾸벅 졸더니 픽 쓰러져 낮잠에 빠져들어요.

어쩌면 가장 부산스러우면서 가장 그윽한 숨결은 어린이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가장 고요하면서 가장 기운찬 넋은 어린이일 수 있어요. 우리 어른은 모두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자라는 동안 부산스러움이랑 그윽함을 어우르는 손길을 익힌다고 할 만해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면서 기운찬 마음으로 씩씩하게 자라기에 어른이 될는지 모릅니다.

간절한 것이 없어 
절실한 것이 없어 

나는 늙는다 (아이러니)

누군가 '사랑해!'라고 발음할 때 
나무의 어딘가에 깃들었던 
초록 눈이 새순으로 돋아나
팔랑이는 것만 같아서 
가슴에서도 꽃이 피어나지,
한 그루 푸른 나무로 출렁이지 

입에서 나온 말이 귀로 들어와 
가슴을 열게도 하고 닫게도 하는 힘은 
초록 눈이 가지고 있지 (초록 눈에 꽃이 핀다)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한테 '사랑해!' 하고 외치거나 속삭이면, 나무 어딘가에 깃들던 푸른 눈이 봄을 그리면서 곧 깨어나지 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살가운 곁님하고 서로서로, 반가운 이웃을 그리면서, 먼 곳에 사는 동무를 헤아리며, '사랑해!' 하고 가장 흔하면서 가장 따사로운 말을 들려줄 수 있는 살림살이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 입에서 나와 이웃 귀로 들어갈 가장 멋진 말을 떠올려 봅니다. 가슴을 열어 줄 수 있는 말 한 마디를, 어깨동무를 하며 즐겁게 꿈을 꾸도록 북돋우는 말 한 마디를 '그윽'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려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그윽>(이정자 글 / 문학의전당 펴냄 / 2016.11.11. / 9000원)



그윽

이정자 지음, 문학의전당(2016)


태그:#그윽, #이정자, #시집, #시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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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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