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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자. 모과, 꽃 복숭아, 감나무, 주목, 사철나무.... 그래도 40가지는 안될 것 같은디."

옆집의 노오종 아저씨는 느리게 고개를 두어 번 가로로 저였다. 70대 초반의 노 아저씨는 용달 화물트럭 일을 하는 틈틈이 나무 키우고 가꾸기를 즐기는데, 그의 집에는 웬만한 조경업체 뺨칠 정도로 나무들이 많다.

매일 노 아저씨네 정원을 바라보며 아저씨네 나무가 최소 40종은 된다고 생각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던 엊그제, 나의 제안으로 아저씨네 정원을 직접 돌아보면서 나무 종류를 헤아려보기로 했다. 하나 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세다가 37종에 이르러 그만뒀다. 집 뒤편에 자리한 향나무 소나무 등까지 포함하면 너끈히 40종은 넘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허어~, 좀 되네. 근데 어떤 것은 이름도 몰러."

노 아저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는데, 그 모습이 '역시' 나무 같은 느낌을 줬다.

수목 천지인 곳이 시골이지만, 촌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나무를 사랑하는 건 아니다. 아니, 남다르게 나무를 좋아하는 노 아저씨 같은 시골 사람을 찾아보기가 예상 외로 쉽지 않다.

노 아저씨는 나무가 왜 좋은지 이유를 똑 부러지게 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냥 천성인가 보다,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무를 보면 편하잖아요, 항상 그 자리에 있고, 계절에 순응하고, 심지어 예쁜 강아지마저도 변덕을 부릴 때가 있는데, 나무는 언제나 한 모습이어서 좋은 게 아닐까요?"

옆집의 노오종 아저씨가 나무를 잘 키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옆집의 노오종 아저씨가 나무를 잘 키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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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내 물음에 반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한테 선물 받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을만한 이렇다 할 선물이 없다. 하지만 딱 하나 아저씨가 공짜로 준 느티나무와 소나무만큼은 내 평생 최고의 선물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충남 공주의 한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저씨는 30년 전 공주 시내의 한 조경업체에서 조경수 운반기사로 일하면서 나무에 마음을 알게 모르게 뺏기기 시작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 뒤 두어해 정도 잠깐 서울살이를 한 적도 있지만, 귀향하기 무섭게 나무를 심고 가꾼 것은 그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네의 몇몇 사람들한테 듣기로는 노 아저씨는 평소 나무 나눠주는 걸 즐긴다는 거였다. "저거 이름은 모르겠는데, 하나 가져다 심을텨?" 나무 종류를 헤아리는 동안에도 수차례나 아저씨는 마음에 들면 나무를 가져가라고 말했다. 지난해 내게 15년 생 쯤은 돼 보이는 멋진 소나무를 주기 전에도, 잇속 빠르게 돈으로 계산하면 100만원 어치는 족히 될 다른 소나무를 건너 마을의 한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나무에 대한 순수하고도 남다른 애정 때문인지, 그가 가꾸는 나무들은 여간해서 가뭄을 타지도 않고 옮겨 심어도 잘 죽지 않는 거 같다. 또 그는 자신의 정원 나무뿐만 아니라 집 근처 동네 길가에 세워져 있는 주인 없는 나무들도 가지치기를 해주는 등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신나서 나무 손질을 한다.

주업인 용달 트럭운전 외에 약간의 밭 작물도 기르면서, 틈나는 대로 나무 손질에 정성을 다하는 아저씨는 천생이 '자연주의자'인 듯하다.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 8년 동안 그를 가까이서 지켜 본 바 그렇다.


옆집 아저씨가 준 소나무(맨 오른쪽)와 느티나무(맨 왼쪽). 내 평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사진 왼쪽 파란 지붕이 아저씨네 집.
 옆집 아저씨가 준 소나무(맨 오른쪽)와 느티나무(맨 왼쪽). 내 평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사진 왼쪽 파란 지붕이 아저씨네 집.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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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도 귀촌도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 즉 귀연을 꿈꾸고 시골로 거처를 옮긴 게 2009년이었다. 헌데 자연과 가까운 시골에 산다고 다 자연주의자는 아니다. 사람은 적은데 농토는 남아돌 지경이니, 시골에서 농사로 생계를 꾸리려 한다면 기계나 화학비료 농약 등에 대한 의존도는 오히려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농약 한 방울 화학비료 한 톨 안 쓰고 400평쯤 되는 밭을 부치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욕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온 게 한두 차례가 아니다. 그만큼 풀 그리고 곤충이나 벌레들과 싸움이 힘들다.

그러나 아저씨는 가능하면 볏짚을 이용해 보온하고 닭똥 등을 퇴비로 활용하며 농약통을 짋어지는 대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여름에 밭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멘다. 요즘 부쩍 관심을 끄는 유기농이니 자연주의 농법이니 하는 걸 그가 배우려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또 아저씨는 그 같은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자연주의 농부의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은 나무를 유달리 좋아하는 점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두어 해전 공주시청에서 아저씨와 우리 집 앞으로 이어지는 도랑을 콘크리트 수로로 깔끔하게 바꿔준 적이 있었다. 시골 사람 열이면 아홉이 좋아하는 그런 시청 공사를 두고 아저씨가 혼잣말로 나지막이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게 자연스럽고 훨씬 좋은데..."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또 이른바 '푸세식' 화장실을 오랫동안 고집해 온 것도 아저씨의 자연주의 품성을 짐작케 한다. 지난 가을 "엉덩이 얼어 터져 제 명에 못 살겠다"는 아주머니의 해묵은 원성을 끝내 어쩌지 못하고 개조공사를 벌이긴 했지만, 그는 무엇이든 인공적인 건 최소한만 하려든다.

3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드는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나무 심기를 고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관상용으로 혹은 울타리로 또 혹은 과일수확이나 수목 판매 등으로, 저마다 나무를 심는 이유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진정 나무를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자연주의에 맞닿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무 하나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땅을 흔히 '불모'라는 단어로 수식한다. 불모의 땅이 생명을 품을 수 없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자연주의란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양식일 것이다. 수목이 존재해야 사람도 동물도 터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의 출발점일 터이다.

지금까지 국내외에 걸쳐 주소지를 둔 곳이 족히 20곳은 된다. 그 중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실천적 모습에서 옆집 아저씨만한 이웃은 없었던 듯하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옆집 아저씨를 보며 느낀 점은 나무에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치고 최소한 나쁜 사람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사랑과 헌신 정도는 어쩌면 자연주의 삶을 가늠해 보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렸습니다. 마이공주 닷컴은 공주시의 우성, 정안, 의당 3개면의 생활정보를 담은 시골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자연주의, #공주, #나무, #수목,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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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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