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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들의 우리에 강원국 선생님을 몰아넣다

행정구역은 포항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경상북도 내륙 지방 청송에 가까운 학교에 부임하면서 내가 한 첫 번째 기획이 강원국 선생님의 강연이다.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주면서 느꼈는데 요즘 아이들의 글쓰기 실력이 거의 문맹에 가깝다. 당최 다른 사람에 대한 것도 아닌 자신의 생을 쓰는데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라는 한 마디 이외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성적으로 치면 하위권에 속하는 우리 학교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요즘 학생들의 글쓰기와 말하기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글쓰기의 대가 강원국 선생님과 청와대 대변인 출신의 윤태영 선생님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와 말하기를 사사 받을 좋은 기회라 생각한 게다. 원래 기획은 두 분을 같은 날 초청해서 말하기와 글쓰기의 사치를 누리게 하고 싶었는데 두 분의 바쁜 일정상 강원국 선생님을 먼저 모셨다.

강원국 선생님은 강의 서두에 '글쓰기' 이야길 많이 하지 않으시겠단다. 앞이 캄캄해졌다. 본교 학생들도 그렇지만 멀리 포항 시내에서 두메산골로 강원국 선생님의 글쓰기 비결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외부 교사와 학생들의 실망이 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우리 학교 학생들의 주의력 결핍증에 대해서 누누이 양해를 부탁드렸지만, 맹수들의 우리에 천진난만한 선생님을 몰아둔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걱정은 했지만 역시 우리 학교 학생들의 주의가 산만했고 외부 청중들은 강연을 4시간 동안 진행하겠다고 했더니 '매우 절망적인' 표정이 역력했다.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책상 삐걱거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느껴진다. 우선 급한 대로 종이 막대를 만들어서 딴짓을 하는 학생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강원국 선생님은 꿋꿋하게 '청와대 조직'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우리 학교 학생들로 말하자면 청와대가 아닌 청화대라고 쓸 놈이 더 많다. 곱게 자란 강원국 선생님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 같아서 장이 꼬이는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확실히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욕심에 강연장을 슬며시 빠져나왔다.

물론 후배 교사에게 '딴짓하는 놈들을 철저히 응징하도록' 부탁을 했다. 강연이 국회 난장판처럼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교무실에 내려와서도 좌불안석은 벗어날 수 없었다. '시간아 빨리 가라'를 끊임없이 외쳤다.

그리고 난폭한 청중에 시달린 강원국 선생님에게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에 대한 위로말씀의 초안을 잡기 시작했다.

초췌해졌을 게 뻔한 선생님을 위해 최고급 삼겹살을 예약하다

점심 식사자리로 예약해둔 식당에 전화를 걸어 '최고급 삼겹살'을 엄선해서 준비하도록 주문해두었다. 심신이 피곤하면 입이라도 즐거워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울러 다음 달에 진행될 윤태영 선생님의 강연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강원국 선생님은 건강하기라도 하시지만, 윤태영 선생님은 건강마저 완전치 않다. 참여정부가 자랑하는 두 보석을 포항 산골로 불러 만신창이를 만드는 역적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고심 끝에 강의 3시간 질의·응답 1시간 총 4시간으로 예정된 강의 일정을 질의·응답 시간을 없애고 3시간으로 진행하도록 수정했다. 차마 고전하는 강원국 선생님을 볼 낯이 없어서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할 것이 분명한 후배 선생에게 수정한 일정을 전달했다. 나는 참으로 비겁한 사람이다. 강의도 제대로 듣지 않는 녀석들이 무슨 질문이 있겠느냔 말이다.

12시가 되었고 초췌한 표정의 강원국 선생님을 봐야 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강원국 선생님의 표정은 썩어 있지가 않았고 밝았다. 한구석에서 근무하는 불쌍한 중생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뒤이어 강연장을 나선 외부 손님들의 표정이 강원국 선생님의 그것과 같았다. 사람이 행복하면 저런 표정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이 너무 유익했고 재미났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이어서 내가 준비한 강원국 선생님의 저서 <대통령의 글쓰기>에 자필 서명을 받기 위한 줄이 이어졌다. 서명을 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념 사진을 찍는데 나는 팔자에도 없는 사진사 노릇을 해야 했다. 강원국 선생님의 저서와 서명을 받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강원국 선생님을 마치 아이돌 스타처럼 여기는 듯했다.

강원국 선생님의 강의에 대한 찬사는 곧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명망 있고 훌륭한 분을 모시게 되었느냐는 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어졌다. '강의가 무척 고급지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뜻깊은 날이었다' '오늘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다'라는 강의 평이 이어졌다. 무려 새누리당의 당원이자 나경원 의원을 아끼는 행정실 직원은 우리 곁에서 전화를 받는 것처럼 얼쩡거리다가 수줍게 강원국 선생의 저서에 사인을 요청했고 우리의 슈퍼스타 강원국 선생님은 "김대중처럼, 노무현같이"라는 서명 문구로 화답하셨다.

외부에서 오신 선생님들은 뒤이어 초청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나에게 압력을 행사하셨으며 우리 학교 홈페이지에 강원국 선생님의 강연에 대한 감동 후기를 남기시겠다고 하셨다. 강연 기획자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하는 고급스러운 청중이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지고 마지막 수업에 들어갔는데 오늘 강연장을 한 줄 요약하는 평을 들었다. 중학교 2학년 애제자의 말이 이랬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는데 후반에 가면 갈수록 재미있었고 강연을 다 들으니까 아무 글이라도 꼭 쓰고 싶어졌다."


태그:#글쓰기,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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