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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5월 11일 오후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갖은 후 청와대 소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왼쪽부터), 권혁기 춘추관장, 문 대통령,이정도 총무비서관, 조현옥 인사수석, 송인배 전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일정총괄팀장, 윤영찬 홍보수석, 임종석 비서실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5월 11일 오후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갖은 후 청와대 소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왼쪽부터), 권혁기 춘추관장, 문 대통령,이정도 총무비서관, 조현옥 인사수석, 송인배 전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일정총괄팀장, 윤영찬 홍보수석, 임종석 비서실장.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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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정권이 교체됐다.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이 집권한 지난 9년 동안 한국 사회는, 안으로는 활력을 잃은 채 깊이 병들어갔고, 밖으로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주변국의 입김에 휘둘렸다. 또한 지금, 시민들의 적폐청산과 개혁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이번 정권교체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실로 막중하다. 이제 우리는 정권교체를 넘어 '적폐청산'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기득권 교체'를 수행해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는 이를 위해 현실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 대선 과정에서 언론개혁, 검찰·경찰개혁, 국정원 개혁, 재벌해체 등 많은 개혁과제가 제기되었지만, 이 글에서는 지금 현실 속에서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개념의 재설정'을 제안하고 싶다. 왜냐면 기득권 교체를 위해선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입이 필요하고, 그것은 새로운 인식 틀의 마련이 없을 경우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이를 하나씩 짚어보자.

1) 정치 : '기획된 보혁구도'를 넘어 '경험적 보혁구도'로

대선 당일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일본의 NHK방송은 대통령직에 당선된 문재인 후보를 두고 '혁신계(革新系)'라 소개했다. '혁신계'란 용어가 다소 이채롭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도 지난 1950년대∼60년대 초 혁신계로 지칭되는 정치세력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 우리 정치구도를 두고 좌우 또는 보수-진보의 보혁구도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실상이 그러한가?

지난 9년 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정권 비판자는 '좌파'로 지칭되었고, 이로 하여 '대북심리전'과 '토벌전'의 대상이었으며, 블랙리스트로 생계를 틀어막고 감시·사찰·협박을 통해 공포를 심어주어야 할 대상이었다. 2012년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이 벌인 댓글공작의 내용을 보면 이점은 확연해진다. 이런 속에서 지난 9년간 이른바 보수-진보 구도는 더욱 현저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들고나온 대부분의 정치적 이슈들은 '보수-진보'의 구도 속에서 이해되었고, 또 미디어들 역시 그런 방식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이는 사안의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을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국정교과서 문제의 경우 그 본질은 학생들의 의식마저 획일화하여 지배하겠다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에 있었지만, 정작 정치권과 미디어에서는 그것을 보수와 진보의 문제로 치환하여 보수는 국정교과서 찬성, 진보는 국정교과서 반대라는 식으로 프레임을 깔았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터져 일시 보혁구도가 무너지는 순간, 박근혜 정권이 붕괴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기실 그간 한국사회의 보혁구도는 일종의 '프레임'으로서 기득권 세력의 권력유지 수단이었을 뿐, 역사적·정치적·사회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결과물이 아니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기실 지금과 같은 양당체제 또는 보혁구도가 확립된 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이른바 '3당 합당' 이후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인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출현했고, 이때 김대중 세력만 야당이 됐던 것이다. 물론 3당 합당은 출범 초기 여소야대와 5공 청산 정국에 직면했던 노태우 정권이 기획한 정계개편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당시 여권에 의해 기획되었던 정계개편의 내용은, 곧 '보혁구도'로의 전환이었고, 3당 합당은 그 일환이었다. 이점은 6공의 황태자라 불리며 브레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의 증언록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처음 박철언은 김대중의 평민당까지 통합하는 '보수정당'을 기획했고, 이를 통한 '보혁구도'로의 정계재편을 기획했다고 한다.(『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 349∼361쪽)

이는 민주화 이후 군사독재에 협력, 부역했던 세력들이 '보수'라는 가면을 쓰고 '생존'을 넘어 장기 기득권 유지에 나섰음을 의미했다. 아울러 기성 제도권 정치에서 활약하던 야당 정치인들까지 보수로 지칭함으로써 이들을 흡수하거나 분열시키는 전략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기획된 이 구도가 길게 보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현재의 보혁구도는 87년 이후 군사독재 잔당들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기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한국사회 자체의 정치적·사회적·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허상의 보·혁 프레임'에서 벗어나 과연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지, 또 현실문제에서 보수와 진보가 나뉘는 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경험하고 터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한마디로 보수와 진보 개념의 새로운 정의(定義)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는 직접민주주의는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는 '구(舊) 기득권 세력'을 청산하고, 의회민주주의와 대의제 정당정치를 제대로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경제 : 생존권 개념을 적극 인정·보장하는 사회 만들어야

다 알다시피 민주주의 사회에는 집회·결사·언론·표현의 자유로 구성되는 '기본권'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한 토대로서 정치적 자유에 방점을 둔 권리이다. 하지만 '기본권'에 묻혀 '생존권'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실제 우리 헌법에도 현재 '생존권'이라는 개념은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기본권과 함께 "모든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에 있어 생존할 권리를 지닌다"는 생존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결과인 빈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그간 빈곤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는 최소한 우리 사회에 더 이상 '기아로 희생되는 구성원'은 없다는 기본 인식이 널리 공유되고 있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가 대도시의 역이나 터미널 주변, 주택가 골목을 지나다 마주치게 되는 '여인숙', '모텔'에 들어가 보면 '쪽방'이 있다. 쪽방 현장을 방문해보면, 어두컴컴하고 좁고 냉난방시설조차 갖출 수 없는, 과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공간에 다양한 사연을 지니고 가난과 질병과 소외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장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이 800조가 넘고 고층빌딩이 즐비한 시대에 도시 한 쪽에서는 쪽방에서 지내며 무료급식에 의지하거나 하루하루 내일의 일거리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에 떨며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거나, 혹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무더위에 폐지를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 저변에 널려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기존의 노년 빈곤층에 더해 새로이 청년 빈곤층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인 권리는 '생존권'일 것이다. 오늘 혹은 내일, 당장 먹을 수 없거나 잘 곳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생존권은 기본권보다도 더 중요한 권리일 수 있다. 단지 돈을 벌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는 몸이 좋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또는 그 밖의 다른 이유들로 인해 생존에 필수적인 주거, 식사, 의료 등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의 사회복지는 대상자의 '노동가능 여부'에만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마치 특권자인양 취급받는 게 현실이다. 수급자가 되는 과정에서나, 되고 난 이후에나 이 점은 동일하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공공 사회안전망 혹은 상호부조에 의해 인간 생활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와 의료 부문에서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 기실 우리 모두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사연으로 인해 언제나 벼랑 끝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편적 복지'와 '기본소득 도입'은 생존권 개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3) 외교 : 안보 개념의 외연적 확장이 필요

외세에 의해 사실상 반(半)식민지 상태로 접어든 지난 19세기 후반기 이후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한반도 주민들이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으로서 스스로 발언권을 가지고 국제무대에 서서 자기의 입장과 의견을 표출하며 주변국과의 관계를 설정해 나갈 수 있느냐 라는 문제였다. 이 점에서 20세기 한반도 역사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갔다. 남북 모두 허상에만 빠져있었다. 한쪽은 '자주'와 '주체'를 '고립'으로 실행해나갔고, 다른 한 쪽은 동맹을 절대적인 우산으로 여기며 심지어 '신성(神聖) 영역'으로 '승격'시켰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도 사드문제, 한미동맹에 대한 태도는 '사상검증의 재료'로 어김없이 동원되었다. 국제역학에 기초한 외교를 사상, 이념과 같은 고정불변의 영역으로 여기는 태도와 인식은 안보문제를 국내정치에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 '유능한 외교역량'에 충실을 가하는 데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았다. 또 이런 통에 정작 우리와 동맹이라고 하는 상대측은 우리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대해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이 점은 최근 사드배치 과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사드 배치는 분명 '한국의 전략'이 아닌 '미국의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직접 피해자인 성주 주민들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드배치 반대' 의견은 한미 양국에 의해 완벽하게 묵살되었다.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태도나 사드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놓고 보면, 한국 정부, 특히 역대 보수정권 인사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미국정부의 입장이나 일본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자국 주민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정부가 어떻게 대내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을까? 더욱이 그들은 안보문제를 사실에 의거하여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국내정치에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아왔다. 마치 사드배치가 북핵 방어용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 결과는 미국의 사드배치 비용 부담 요구로 나타났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를 표방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안보와 경제가 분리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입론이며, 아울러 안보를 '군사적 개념'에만 국한시킨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안보와 경제가 분리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일까? 당장 미국만 보더라도, 미국의 안보정책이 무기 수출시장 자원 확보, 전쟁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이 사드 배치에 대해 대한(對韓) 경제 보복 조치를 취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 현대 세계사에서 안보·정치·경제가 분리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게 국제정치사의 기본상식에 해당한다. 현재의 '국가 간 체제'에선 그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문제 해결의 출발은 남한 내에서 '안보' 개념의 외연적 확장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개성공단의 경우 남북 경제협력과 휴전선 일대 군사적 긴장 완화라는 두 측면이 결합을 이룬 경우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재 남한의 안보 개념은 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이제는 동북아 전체로 시야와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층위에서 안보 개념의 확장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한반도의 주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4) 개헌 : 87년 체제의 개편이 아닌 보완과 확장으로

정권교체 당일부터 일각에서는 개헌을 거론했다. 하지만 지금은 개헌보다 개혁이 우선이다. 지금 개헌은 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들의 '한가한 담소'로만 보일 뿐이다. 정치권은 지금 시민들의 개혁 요구가 단순히 수사적, 당위적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현재 시민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일상 속에서, 일상을 지배하는 체제와 구조가 무언가 '잘못됐다', '불공정하다', '절벽 같다'라고 느끼고 있으며 여기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개혁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박근혜 탄핵과 이번 정권교체는 87년 헌법 질서를 국민들이 최초로 사용한 사례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마 우리 역사에서 시민들이 헌법을 사용한 최초의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근래 헌법에 대한 일반의 높은 관심 역시 이를 반영한다. 한마디로 '87년 체제'는 30년이 흐른 이제야 시작됐다. 국회와 기성 정치권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앞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국민들은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권리와 대통령 탄핵권을 발동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는 그동안 2008년 광우병 촛불 때부터 시작해 2013년 국가기관 대선개입, 2014년 세월호 등 촛불집회가 열릴 때마다 현장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것이 실제 확인되고 실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점에서 '87년 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과 감각은 이제야 잡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개헌 논의는 '시기상조'인 측면이 있다.

설사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를 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5당 구도에서 내각책임제나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권력구조 개편을 가장한 권력 나눠 먹기 놀음'으로 전락해선 안 될 것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 4월 혁명을 계승하는 현행 헌법의 기본 골격과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 그간의 시대변화에 발맞춘 보완 수준에서 그쳐야 할 것이다. 예컨대 성 소수자와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 금지 문제, 인구절벽 해소, 국민생존권 보장, 국가공공성 확대, 광장의 직접민주주의 제도화, 비례대표 의석 확대, 정보정치·공작정치의 엄금과 처벌 등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향후 개헌은 '87년 체제의 개편'이 아닌 '87년 체제의 보완과 확장'의 개념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태그:#기득권 교체, #새로운 패러다임, #개념의 재설정, #생존권,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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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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