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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미술시간,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하얀 스케치북에 빨간색으로 칠한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보여주며 '뭐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동그라미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의 의도를 어림해 '쌍둥이 달 같다'고 했습니다.

아니라고 하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아니라고만 하던 친구가 '눈 쌓인 언덕에 나타난 하얀 토끼'라고 했습니다. 눈도 하얗고 토끼도 하얘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토끼 눈이 빨간 색이라 토끼눈만 보이는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싸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흰색 스케치북에서 수북하게 쌓인 눈도 보이고, 하얀 털 속에 감추고 있는 토끼 꼬리도 보이는 듯 어른댔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합니다. 대상도 없고, 실체도 없고, 제한도 없는 무궁무진입니다. 어떤 상상력은 태고적 이야기만큼이나 까마득하기 그지없지만 어떤 상상력은 현재를 미래로 견인하는 구동력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글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그려내고, 음악으로 나타냅니다. 상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내려는 노력은 예술로 승화되고 과학으로 발달해 현실 속에서 실현됩니다.

미술에 스며있는 신명,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지은이 최광진 / 펴낸곳 미술문화 / 2018년 6월 15일 / 18,000원
▲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지은이 최광진 / 펴낸곳 미술문화 / 2018년 6월 15일 / 18,000원
ⓒ 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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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지은이 최광진, 펴낸곳 미술문화)은 1500년쯤 역사를 갖고 있는 고구려 벽화부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던 백남준이 구현한 우리나라 미술, 그 수 천 년 동안 우리나라 미술에 유전인자처럼 미의식으로 스며있는 '신명'을 조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의식중에 하품을 하고 눈을 깜빡이는 데도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거늘 하물며 일부러 그리고, 작심하여 색칠하거나 조형한 미술에 이유가 빠지고 의미가 없을 리 없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은 "멋을 느끼고 창출할 수 있는 의식"으로 신명, 해학, 소박, 평온'을 미의식으로 발현해 왔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그 어떤 이가 그린 고구려벽화부터 백남준이 구현한 <야곱의 사다리>까지에 스며있는 미의식 중 '선명'으로 읽을 수 있는 요소들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소리로 의미를 전달하는 반면 미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선과 색깔, 구도와 조형 등으로 의미를 그려냅니다. 우리나라 미술이 신명을 담아내는 그릇은 선(線)입니다. 어깨춤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신명,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의 비경, 전설 속 상상의 동물까지도 유려한 선으로 담아 낸 게 우리나라 미술입니다.  

고구려 벽화의 선은 파도나 바람처럼 부드럽고 연속적이며 획일적이지 않은 자연의 선율이다. 이는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분출시키는 표현주의의 선과 다른 것으로, 우주의 기운과 율려와 감각적인 공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55쪽


이처럼 여러 동물을 혼합하여 이상적인 동물을 만드는 발상은 그가 항상 동경했던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에서 착안한 것이다. <사신도>는 지상의 여러 동물의 장점을 합성하여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영물을 만들었다. 이중섭의 <부부>는 상서로운 불사조를 상징하는 <주작>을 <현무도>의 뜨거운 입맞춤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207쪽


이중섭이 그린 <부부>는 그 실체를 어림하기 어려운 새가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고구려 벽화, 사신도 속 주작은 봉황에서 출발하여 수탉 머리에 앞은 기린, 뒤는 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무늬는 용, 등은 거북, 턱은 제비, 부리는 닭, 꼬리는 공작의 형태를 결합한 상상 속 동물입니다.

이에 반해 겨울을 상징하는 현무는 뱀과 거북만이 결합된 형상입니다. 이중섭이 그린 <부부>는 바로 이 <주작>과 <현무>가 뜨거운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선으로 담아낸 의미는 사신도가 돼 고구려 벽화에서 똬리 틀고, 금동대향로로 피어나고 범종소리로 울렸습니다. 정선, 변관식, 이상범의 손끝으로 그려진 선은 이응노, 박생광, 이중섭, 천경자, 오윤 등에 의해 표현방식을 달리하는 신명으로 유산됩니다.

한국미술, 선으로 그려낸 신명

사물놀이패들이 울리는 덩더꿍 소리는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오선지에 상상을 옮겨 그린 어떤 음표는 누군가의 마음을 애잔하게 울리는 음악이 됩니다. 음악에만 어깨춤을 추게 하는 게 신명이 담겨 있는 건 아닙니다.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 그 의미를 흠향할 수 있는 미술에도 어깨춤에 버금갈 신명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상상으로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상상하는 자의 몫이고, 누군가가 몫으로 나눠준 상상을 읽는다는 건 상상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걸 덤으로 얻는 행운입니다.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우리 미술에서 미처 읽지 못했던 신명을 알뜰하게 일깨워 줍니다. 저자가 상상을 나눠주듯 설명하고 있는 신명, 우리나라 미술에 스며있는 신명을 읽는 것이야 말로 미술 지식으로 챙길 수 있는 아름다운 덤이 될 거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지은이 최광진 / 펴낸곳 미술문화 / 2018년 6월 15일 / 18,000원



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1 : 신명 - 역경을 이겨내는 흥겨운 정서

최광진 지음, 미술문화(2018)


태그:#미술로 보는 한국의 미의식, #최광진, #사신도, #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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