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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첫 번째).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첫 번째).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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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한국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은 <통신전(通信箋, 홍보, 회람, Circulaire)>을 발행하고, 이를 각지로 보내는 한편 언론 기고, 서신 발송, 소책자(브로슈어) 간행, 한국문제 설명회 개최 등 신속하고도 힘찬 공보 활동을 펴나갔다. 이를 통해 각국 정부의 기관 및 공관과 언론기관 그리고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3·1운동 후 프랑스 파리에 설치된 한국통신국에서 발행한 <통신전>에 김인태는 관계하였다. <통신전>의 8~10호를 보면, 각 호의 끝에 'Kim T'ang'이라는 서명이 들어가 있다. 김탕(金湯)은 김원봉이 파견한 김철성이며, 박재혁, 오재영(오택)과 함께 구세단 활동을 한 김인태(金仁泰)이다. 11호부터는 개인 서명이 없이 발간되었다. 김탕의 서명이 들어간 사실로 보면, 정공단의 동지 김인태가 파리 한국통신국에서 <통신전>발간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인태(김탕), 파리 한국통신국에서 활동하다

<통신전> 제8호(1919년 5월 28일)는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본 행위 고발 및 이에 항거하는 한국 애국자의 청원서"였다. 제암리 학살 사건과 서울 3·1 만세운동과 사세가와 총독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 그리고 광무황제(고종)의 독살설을 보도하였다. 문서의 끝에는 "한국통신국 김탕"이라 서명되어 있다. <통신전>제9호(1919년 6월 11일)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유혈 탄압을 알림"이다.

1919년 3월 초에 자행된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한국의 국민적 운동에 대한 유혈 탄압이 이루어짐으로써 처음에는 폭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평화로운 시위만 했던 대중을 분노시키기 시작했음과 범국민적 운동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한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렸다. 역시 문서의 끝에는 "한국통신국 김탕"이라 서명되어 있다. <통신전> 제10호(1919년 6월 [12]일)는 "강화회의의 4대국 정상회의에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의 서신 전달요청"이다. 제목 그대로 이승만의 파리강화회의 정상에 보낸 서신이다. 문서 끝에는 "한국위원회 김탕"이라 서명되어 있다.

파리 통신국에서 편찬하고 간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통신전>은 1919년 4월부터 12월까지 총 23회에 매회 2,000부씩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발겭된 것은 22호이며, 6호는 미발행이라 한다. <통신전>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정부 기관과 언론사, 그리고 주요 대학의 도서관 등에 배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신전>의 발행 목적은 대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의 개최, 대내적으로 3·1운동의 발발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여 '잊혀진 나라(the forgotten nation)' 한국의 존재를 유럽 나아가 세계에 다시금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구주의 우리 사업』에서는 이를 '천하(天下)의 동정(同情)'이라는 표제 하에, "우리의 주장이 여하히 합법적이며 우리의 운동이 여하히 정의적(正義的)임을 천하가 요해(了解)하고 동정함은 아(我) 국민 일반의 흔희(欣喜) 불감(不堪)하는 바어니와"라고 했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임정 대표단의 선전 외교활동 결과로 유럽의 각 신문에 한국 문제가 많이 게재되었다.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유럽 각 신문에 한국문제가 게재된 건수가 파리 80종 323건, 프랑스 각 지방 53종 100건, 유럽 전역 48종 94건으로, 총 181종의 신문에 517건의 기사에 달하였으며, 프랑스의 경우 133종 신문에 423건의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한다. 한국통신국의 활동 결과, 한국 문제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어 국제여론을 조성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결과 프랑스 상원 및 영국하원에서는 여러 차례 한국 문제에 대한 질의와 토론이 있었으며 이탈리아 하원의원 스까노는 개인적으로 한국독립을 후원하겠다는 뜻을 표하는 등 한국을 동정하는 인사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대표단의 홍보활동 성과는 영국에서 가장 큰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비극>의 저자 F‧A‧매켄지는 1919년 3월 이후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한국>이란 책자를 간행하여 영국 내에 무료로 배부함으로써 한국 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으며, <조선의 부흥>의 저자 조셉‧W‧글레이브스는 국제 사회 봉사회를 통해 종교단체와 연락을 취함으로써 한국에 있어서의 일제의 기독교도 박해와 학정을 비난 선전하는 등 배일선전에 노력한 결과 영일(英日)동맹으로 굳게 묶여있던 영국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깊은 동정을 심었다.

파리에서의 활동은 만세운동 이후 '완전 독립(absolute independence)'을 주장하는 독립청원으로 바뀌었다. 일제의 지난 10년간의 식민지배가 부당하며, 일본의 야욕이 결국 국제정세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위임통치 또는 즉각적인 독립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청원 문제는 벽에 부딪혔다. 파리강화회의 측은 한국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강화회의에서 취급될 성질의 것이 아니고 곧 창설될 국제연맹에 제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답신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앙땅뜨(Entente)> 지는 1919년 7월 7일자 기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한국민의 절규를 외면하고 한국민이 영원히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을 보고만 있었다"라고 분개하였다. 르 쁘띠 마르세이에(Le Petit Marseillais) 지는 7월 22일자에서, 강화회의는 한국인들의 요구를 약식으로 검토한 후 "국제연맹에서나 문의해 보라"는 식으로 떠넘겼다고 비평하였다.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인 열강들의 이권 도모를 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파리 한국통신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도 불구하고 약소 민족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그리하여 강대국 간의 전후(戰後) 처리 문제에만 집중하고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토론도 없이 1919년 6월 28일 끝나고 말았다. 파리강화회의 종결 이후 파리 한국통신부는 선전 외교활동을 계속 추진했다.

1919년 8월 6일 김규식은 파리만국기자구락부 환송연에서 다음과 같이 울분을 토로했다. "4천 년이 넘는 역사와 독립국가로 존재한 이후 오늘날 일본의 속박 하에서 꼼짝도 못 하고 떨고 있는 2천만 영혼들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정의와 사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프랑스에 경악했습니다. 중국과 함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먹잇감에 불감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탐욕에 끝까지 사울 것입니다."

김탕의 미국행과 그 이후의 행적

1919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조선사회당 대표로 조소앙과 이관용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 민족의 독립에 관한 결의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결의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기에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조소앙은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 집행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해 "각국 대표가 스위스에서 가결한 한국독립 승인 문제를 본국 국회에서 제안해 통과토록 한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이끌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기대했던 한국 문제를 거론할 가망성이 희박해지자 김규식은 1919년 5월 25일 이승만에게 보낸 서신에서 미국에서 제2의 선전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싶다는 요청을 보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자 1919년 8월 8일 김탕, 여운홍과 함께 파리를 떠났다. 김규식은 8월 24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뒤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의 초대 위원장이 되어 1920년 9월 말까지 활동하였다.

김인태(김탕)이 파리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한 파리 한국통신국의 활동은 가시적인 실패와 성공을 넘어서 한국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파리강화 활동 소식은 국내 여론을 자극하며 3‧1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강대국은 자국의 이익에 몰두했고 약소 민족의 독립문제에는 무관심했다. 소수의 인원과 열악한 환경하에서 전개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한국대표단의 외교활동은 3‧1운동의 목표와 가치를 국제 사회에 전파했던 숭고한 독립운동이었다.

김인태는 1935년 2월 상해 공동조계 공무국 경무처에 체포된다. 김인태[Kim Im Tai 金仁泰 (Chin Jen-T'ai)], 김탕[Kim Toh 金湯 (Hin Tang)], 김종의[Kim Sho I 金鐘意 (Chin Chung-I)]로 그의 이름은 여러 개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체포 사실은 당시 국내에도 시시각각 보도되었다.

과격한국인 용의자 김탕은 의열단 수뇌부 관계자 혐의로 상해 영사관 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탕, 김종의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김인태는 1896년 6월 한국 부산에서 태어났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그는 6월 23일생이다. 그는 1910년에서 1914년까지 일본 강산(岡山)시 김고(Kim Ko)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한국에 귀환했다. 귀국 후 김원봉과 만나고, 오택 등과 구세단 활동을 하였다.

1915년 그는 상해로 가서 우성(Woosung)에 있는 동제대학(同濟大學)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였고, 이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되어 그는 중국당국으로부터 여권을 발급 받아 학업을 계속하기위해 유럽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갔다. 당시 경찰은 김인태가 파리에 머문 1919년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의 파리 한국통신국 활동에 대해 몰랐던 것 같다. 그는 파릭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인물이 아니라 김원봉에 의해 일본대표단 암살요원으로 밀파되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체류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기 위한 단순한 경유지로 보았던 것 같다.

김규식과 1919년 8월 미국에 갔던 김인태는 구미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1923년 가을 시카고대학에 입학하였다. 청소년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국행이었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1925년 학업을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뉴욕으로 가서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여 1928년에 졸업했다. 그는 후에 뉴욕에서 중국식당을 개업했지만 1932년에 사업상 매매한 후 요코하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의 구직에 실패한 그는 1934년 1월 상해로 갔다.

상해 망지로(望志路) 212번지에 거주하는 김두봉(金枓奉, 1889~1960)과 약 2주 동안 같이 지냈다. 김두봉은 부산 기장 사람으로 상해 임정에서 활동하며 한글 사전인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의 저자였으며, <말모이>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최현배의 스승이었다. 중국에서 학자 활동과 무장투쟁 활동을 하다가 1935년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40년 이후 화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광복 뒤에는 38선 이북으로 귀환,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한의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였다.

상해에서 김두봉의 집에 머물렀던 당시 김인태는 구세단을 같이 한 김원봉과 파리 통신국에서 활동했던 김규식을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당시 김규식이 총재였고 김원봉은 당 서기였으며, 김두봉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고,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김인태가 김원봉의 주소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김병태(金餠泰, 1899~1946)란 이름의 김두봉의 동생과 친해졌다. 김병태는 김무(金武) 또는 김평국(金平國)이란 다른 이름이 있으며 과격 한인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주요 단원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병태는 김두봉의 동생이 아니다.
 
광복군총사령부 전시실에 걸린 약산 김원봉 사진
 광복군총사령부 전시실에 걸린 약산 김원봉 사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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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의 집안 형제는 '두(枓)'자 항렬을 사용한다. 실제 김병태는 김인태의 동생이다. 1936년 일제가 조사한 민족혁명당 당원 중에 김병태(38세)는 김무(金珷), 김빈(金彬)으로 부산부 좌천동 581번지에 거주하였다. 이 주소는 김인태와 김병태의 본적 주소이다. 김두봉(48세)은 별명이 백연(白淵, 百淵)·백련(帛連)으로 경성부 숭사동 98번지에 본적 주소를 두고 있다. 김두봉과 김병태는 중국 남경(南京)에 같이 있었고 민족혁명당 당원이었다. 당시 김병태는 전(前) 의열단원 단장이자 민족혁명당 서기부장인 김원봉의 비서였다. 김두봉의 5촌 조카 딸이 박차정이고, 박차정은 김원봉의 부인이다. 김두봉의 출신지인 기장은 김인태의 처 박필애(1896년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만주사변(1931) 발발 직후 김원봉의 의열단은 1932년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3년간 130여 명의 청년 혁명가를 배출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후 의열단 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를 중점적으로 지원하였다. 1934년 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소재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어, 한인 독립운동가 92명에게 군사교육을 시행한 것도 오롯이 한중 연합의 결과였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한인 생도들은 조선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의 주요 역량으로 성장하면서 1930년대 한인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김인태의 동생, 김병태는 1934년 3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자 의열단원 박건웅(朴建雄)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유일당 건설을 결정하였다. 1935년 7월 모든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이 총 결집하여 유일당으로 건설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되자 민족혁명당의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에 보내는 문서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김인태(김탕)은 1934년 2월 20일 상해를 떠나 장사(長沙)로 가서 호남성(湖南省) 류양(瀏陽, Liuyong)의 군수인 왕영조(王英兆, Wong Ying Zao)와 면담하였는데 왕영조는 동료 학우의 형이었다. 그는 왕영조에게서 내각의 차관인 하요조(賀耀租, Yu Yao Tsu, 1889~1961에 대한 소개장을 받았다. 하요조는 중국국민당 장제스의 심복으로 1931년 중국 국민당 집행위원, 감녕청선위사(甘寧青宣慰使)。감숙성정부위원(甘肃省政府委員)로 있었다.

그 후 터키주재 중국대사(1934.11~1937. 봄)로 있다가 중앙감찰위원이 되어 귀국하였다. 1937년 4월부터 12월까지 주소량(朱紹良)을 대리하여 간쑤(甘肅)성 정부의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 27일 김인태는 장사로부터 남경(南京)에 도착하여 다음 날 하요조와 면담하였는데 하요조는 김인태를 위해 일거리를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인태(김탕)는 다시 상해로 돌아와 망지로 212번지 김두봉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로부터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1934년 말경 김인태는 국민당의 중앙군사학교(Central Military Academy)의 교관으로 추천받았는데 학교장인 장치중(張治中, Tsang Tz Tsoong, 1890~1960)이 그에게 정식 임명은 후에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김병태, 김인태 형제가 군사학교 교관으로 활동할 당시 국민당 정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 진영을 중국과 연대하여 항일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해 가는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장치중은 중국 국민당 집권 때인 1928년 군사 정치 국장을 역임한 후 난징으로 이주한 중앙 육군 사관학교의 교육자로 1937년까지 중앙 군사관학교의 최고 교육 책임자로 재임하였다. 1937년 11월 임정이 장사(長沙)에 도착했을 때 호남성 정부 주석인 장치중은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해주었다. 1938년 초 한국어 방송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었다. 1938년 5월 7일 백범 김구가 총격을 받아 생명이 위독할 때 김구의 수술비와 입원비 전부는 당시 상아의원까지 찾아와 병문안을 한 호남성장 장치중 장군과 장개석이 지원해줬다. 장치중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 팽덕회, 주은래, 등소평 등과 함께 56명의 위원 중 한 명이 되었다.

동생 김병태처럼 김인태가 군사학교의 교관으로 활동하였음은 임정 또는 의열단의 군사력 향상에 어떤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김인태를 체포한 상해 일본영사경찰은 의열단 수뇌부 관계자로 단정한 것이다. 김인태가 만난 하요조와 장치중의 관계로 본다면 당시 국민당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국민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함께 항전을 계획할 뿐만 아니라, 전후에 극동과 세계평화를 세우는 데에 더욱 합작을 해야 함을 강조하며,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원조를 요청하는 문서가 오고 가는 것으로 보아 항일전쟁 당시 협조체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인태는 남경에서 상해로 돌아와 하비(霞飛) 황빈로(璜浜路) 덕은리(德恩里) 5호에서 거주하며 김종의(金鐘意)란 가명을 사용하는 무직 상태에서 한국에서 상해로 오는 그의 부인 박필애(朴畢愛, 1896년생)를 만나기 위해 세관에 있는 동안 1935년 2월 5일 오전 10시 일본영사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영사관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김인태로부터 의열단과 관련한 어떤 결정적 증거도 얻을 수 없었던 일본영사경찰은 그를 불필요한 인물로 분류하여 중국에서 추방하며 2년간의 상해 재류 금지처분을 내리고 평안환 편으로 송환하였다. 4월 21일(22일) 오전 4시 30분에 인천에 상륙하였다가 경기도 경찰부에 인치되어 특고과원에 취조를 받던 김인태는 신의주 모사건과 관련된 것 같았지만 경찰은 혐의를 찾지 못하였다. 김인태는 5월 6일(7일) 무사방면되어 경상여관에 유숙하였다. 그는 부산출생으로 아메리카와 남경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당시 신문은 보도하였다.

김인태는 1935년 석방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해방 이후 김원봉이 부산을 방문하여 박재혁의 묘지를 참배하였을 때 동행하여 왕치덕, 오택, 김인태, 김원봉이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그는 부산 좌천동 출신으로 부산에서 구세단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파리 통신국에서 <통신전>을 발간하는 홍보활동에 열성을 다하였으며, 그의 동생 김병태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아직 그는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파리에 처음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할 구상을 하였던 여운형은 "혁명가는 길 위에서 죽음을 두려워히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식민지 조선은 대한독립 만세운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었다. 역사는 윤치호와 같은 현실주의자들이 아니라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이상주의자들에 의해 반걸음, 한걸음 진보하는 것이다.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해야만 하는 길이 바로 자주적 독립운동의 길이다.

덧붙이는 글 | 작가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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