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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개천절이 되면 개천대제(開天大祭) 행사가 열리고, 전국체전의 성화가 채화되는 장소가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대부분 눈치를 채는 그 장소, 바로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 사적 제136호)이다.

과거 마니산은 마리산(摩利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동국여지지>를 보면 마니산의 정상에 참성단이 있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마니산의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보수공사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 참성단 마니산의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 보수공사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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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에는 1264년(원종 5)에 참성단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참성단에서 국가 차원의 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계속 유지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는데, 사당 아래 있었다는 재궁(齋宮)에서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대언(代言)이 되어 재숙(齋宿)을 했다고 한다.
 
제사에 제기와 제물 등을 보관했던 재궁(齋宮)으로 추정된다.
▲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 제사에 제기와 제물 등을 보관했던 재궁(齋宮)으로 추정된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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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나무로 인해 지상에서도 참성단의 위치를 알 수 있다.
▲ 참성단 소사나무 소사나무로 인해 지상에서도 참성단의 위치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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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참성단은 단군과 관련된 장소이자 제단으로 주목을 받았고, 나름의 상징성을 간직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성단은 현재 보수 공사로 인해 출입이 통제되고 있으니, 참성단을 방문하실 계획이라면 참고해야 한다.

한편 참성단은 마니산 국민관광지 ▶정수사 ▶함허동천 방향으로 올라갈 수 있다. 또한 지상에서도 참성단은 쉽게 구분이 되는데, 이유는 참성단에 있는 '참성단 소사나무(천연기념물 제502호)' 때문이다. 

참성단 금표가 세워진 이유는?

이처럼 참성단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참성단과 관련이 있는 금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참성단 금표가 마니산의 등산 코스가 아닌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65번지)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성단을 찾은 뒤 별도로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를 찾지 않는 이상 해당 금표를 마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자연 바위에 금표/갑자팔월립(禁標/甲子八月立)가 새겨져 있다.
▲ 참성단 금표 자연 바위에 금표/갑자팔월립(禁標/甲子八月立)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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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天祭菴宮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4호)는 앞선 기록에 나온 바 있는 재궁 터로 추정된다. 참성단 금표는 강화 참성단 천재궁 터로 가는 길에 있는 자연 바위에 '금표/갑자팔월립(禁標/甲子八月立)'이 새겨져 있다.

해당 금표를 세운 이유는 참성단이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전해지는데다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참성단 일대의 나무를 벌채하거나 함부로 출입하는 행위 등을 금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금표의 존재는 당시 단군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실제 <일성록>을 보면 1786년(정조 10)에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평안도 강동현에 있는 단군묘(檀君墓)로 전해지는 곳이 황폐해져 간다고 말한 뒤 단군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이때 단군을 "동방에 맨 먼저 나온 성인"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단군이 우리 동방 사람에게 실로 영원히 잊지 못할 은택을 끼친 것이므로 존중하고 받들기를 지극히 높고 완비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단군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군묘의 금표와 참성단 금표
▲ 단군상 조선시대에 단군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군묘의 금표와 참성단 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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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를 보면 이때 단군묘에 수호군(守護軍) 2명을 두고, 30보(步)를 한계로 금표를 세웠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로 인식된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단군묘 일대에 대한 나무의 벌채를 금하고,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금표를 세웠던 것이다. 이처럼 단군묘 금표의 사례는 단군과 관련된 장소이자 제단인 참성단에 금표가 세워진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참성단 금표는 과거 단군과 참성단이 어떻게 인식이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흔적으로, 금표에 담긴 이야기와 상징성은 제법 강렬한 인상을 준다.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참성단 금표가 널리 알려지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니산을 찾을 때 참성단과 더불어 참성단 금표를 함께 주목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태그:#참성단, #참성단 금표, #참성단 소사나무, #단군, #마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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